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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23. 2018

내 남자의 취향

남편의 옷을 산다는 것, 그 뒷이야기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신혼집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붙박이장 문을 열었는데 시큼털털한 청국장 냄새가 가득했다. 이사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을 때였으니 세탁해서 가져온 옷들과 새 이불 밖에 없는 붙박이장에서 나는 역한 새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방향제와 나프탈렌도 이미 넣어 놓은 상태였으니 분명 이 냄새는 세탁하지 않은 옷 어딘가에서 날 것이었다. 하나씩 냄새를 맡아가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원인은 바로 남편의 청바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세탁하지 않았으면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너무 놀라 가까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정신이 번쩍 나도록 악취가 풍겼다. 당장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거 냄새 좀 맡아봐.”

킁킁 냄새를 맡아본 남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냄새가 좀 나네.”

“이게 좀이야? 와, 사람 옷에서 이런 냄새가 나려면 대체 어떻게 입어야 하는 거야?”

전 여자친구가 선물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디건을 걸친 남푠

나보다 옷의 가짓수가 적긴 했어도 남편의 청바지가 그것 하나뿐은 아니었다. 조금씩 다른 색의 면바지와 청바지들이 있었다. 비록 전 여자 친구들이 사준 옷이라 해도 예쁜 셔츠와 카디건도 여럿 걸려 있었다. 정말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냄새를 처리해야 했다. 냄새나는 청바지를 당장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지금 세탁기를 돌려 청바지를 말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급할 것 없으니 내일 세탁하자고 했다.


“내일 하자. 주말이니까 급하지 않잖아.”

“나는 저 청바지 입고 싶은데?”

“주말엔 다른 바지 입고, 저 청바지는 세탁해서 널어놓자.”

“아니야. 난 저 바지 입고 싶어.”


이게 웬 옷 투정이람. 깨끗한 다른 바지들은 남편의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그 청바지를 입고 싶다고 안달을 했다. 특별한 바지도 아니었다. 그저 워싱이 살짝 들어간 푸른 청바지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 그 바지를 자주 입긴 했다. 생각해보면 주말마다 그 청바지를 입은 것 같았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떠올리자면 결혼 준비 기간 내내 주말에 그 청바지를 입은 것 같다.


“여보, 혹시 저 청바지 마지막으로 세탁한 게 언제야?”

남편은 한참 생각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세 달 전?”

그러니까 청바지가 풍기던 냄새는 세 달 간 세탁하지 않은 바지의 연륜의 냄새였다. 나는 돌고래처럼 괴성을 지르며 당장 세탁기를 돌렸다.

“아니, 어떻게 바지를 세 달씩 안 빨고 입을 수가 있어?”

“난 그 바지가 좋아서.”


헤헤거리며 웃는 남편은 사태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더욱 놀랐던 점은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남편이 덜 말라 축축한 청바지에 다리를 넣다 내게 걸려 등짝 스매싱을 맞았다는 것이다.


또 한 번 해괴한 일이 생겼다. 지난번 청바지의 악취에 놀라 갈아입기 좋을 청바지를 더 구입한 후였다. 여벌의 청바지를 새로 산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바지 안쪽이 허옇게 헤져 있었다.

“어머, 여보 이 바지 좀 봐. 이거 입고 험한 데 다녀왔어? 왜 이렇게 헤졌을까?”

“몰라. 나 그 바지 좋은데.”


남편은 모른다고 답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이 바지가 좋다는 남편은 또 주구장창 바지 하나만 입었을 것이다. 옷장에 있는 옷들을 내가 주기적으로 세탁했으니 냄새는 안 났겠지만 헤지는 건 세탁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쩜 이렇게 좋아하는 옷은 하나만 닳아 헤질 때까지 입는 걸까? 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여보, 옷이 이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돌아가면서 입으면 이렇게 헤진 바지 입을 일도 없을 텐데.”

“아, 몰라. 난 그게 좋아.”

“그럼 전에 세 달 동안 입었던 그 청바지는?”

“아, 그거? 몰라. 그것보다 이게 더 좋아.”

또 헤헤거리는 남편은 바지가 헤지든 냄새가 나든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상관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 뒤로는 정기적으로 세탁하면서 헤진 곳이 없는지 매번 바지 안쪽을 살펴봤다. 그렇게 살펴가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옷은 대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남편의 취향이 한결같지만은 않았다. 어느 해에는 라운드 티는 입기 싫다며 피케 셔츠만 주구장창 입었다. 내가 보기에 얇은 라운드 티가 여름에 더 시원할 만한데, 남편은 라운드 티는 불편하다는 묘한 주장을 펼쳤다. 그다음 해에는 피케 셔츠가 좋다는 남편에게 맞춰 라운드 티를 사지 않고 피케 셔츠를 몇 장 샀다. 그랬더니 이제는 라운드 티가 입고 싶다며 몇 장 더 사달라고 했다.


“피케 셔츠가 더 좋다며. 라운드 티 불편하다며.”

“몰라. 라운드 티 더 사줘. 많이 사줘.”


올여름이 오기 전에 남편은 작년에 사줬던 린넨 바지를 사달라고 했다. 작년에 그 바지를 얼마나 신나게 입었는지 헤지다 못해 망사처럼 얇아질 지경이었다. 그 주말에 남편과 백화점에 들러 린넨 바지를 하나 샀다. 그런데 먼저 사달라고 한 남편은 린넨 바지는 뒷전에 두고 또 주구장창 청바지만 입었다.


“린넨 바지 사 달래서 샀더니 왜 안 입어?”

“몰라. 그냥 청바지가 좋네.”

이럴 땐 해마다 바뀌는 옷 장단에 맞추느라 열도 받지만, 나 역시 입고 싶은 옷에 더 손이 가니까 강제할 부분은 아니라고 본다.


얼마 전에는 도톰한 티셔츠를 하나 샀다. 간절기에 입기 좋은 두께였다. 다음 달에 여행이 잡혀있는데 그때 입으면 좋을듯해 미리 사놨다. 남편은 단번에 마음이 들었는지 폭염이 급습한 더운 날에 그 옷을 꾸역꾸역 입었다. 나는 당장 다가가 갈아입으라고 했다.

“여보, 이거 아직 입긴 더워. 다음 달에 입지 그래. 세일이라 사긴 했는데 아직은 덥단 말이야.”


남편은 내 말에 알았다고 대꾸해놓고는 안 보는 사이에 슬그머니 두꺼운 티셔츠를 꺼내 입다가 걸렸다. 마치 식탁 위에 차려둔 사람 음식을 먹다가 현장을 걸린 강아지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뜬 정지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유, 그래 여보 맘대로 입어. 더워도 나는 몰라.”


내 말에 신나게 두꺼운 티를 입고, 또 주구장창 입는 청바지를 입고 남편은 외출을 하고 왔다. 집에서 나갈 때 보니 구레나룻 부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래도 좋다고 입고 나가는 남편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 웃기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아내에서 여자 친구로 되돌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의 옷을 사는 나는 여전하다. 하지만 아내가 품는 걱정과 잔소리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여름이면 남편에게 최대한 시원하면서 말끔한 옷을 입히고 싶고, 겨울이면 찬바람에 서럽지 않도록 따끈한 옷을 챙기고 싶다. 봄에는 화사한 청년의 느낌을 유지시켜 주고 싶고, 가을이면 쓸쓸해 보이지 않도록 다정한 차림새를 꾸며주고 싶다. 더불어 매년 바뀌고 변덕이 심한 남편의 옷 취향을 존중하며 지내고 싶다. 좋아하는 옷을 즐겨 입을 수 있다는 건 일상의 즐거움이다. 남편의 취향이 민소매에 금목걸이가 아닌 것만도 감지덕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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