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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25. 2018

남편의 비밀 앨범

배우자의 추억은 어디까지 존중할 수 있을까?

예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결혼 준비과정에서 남편은 과거 사진을 홀랑 들킨 적이 있다. 혼수와 예식 준비에 필요한 자료와 목록을 드라이브에 업로드하던 중 자동 동기화돼있던 그의 사진들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나와 남편은 연애에 앞서 누나,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낸 기간이 꽤 있었다. 그동안 그가 내게 했던 연애상담과 셀 수 없이 많았던 연애 경험담 속 주인공들이 PC 모니터에 현란하게 펼쳐졌다.


청각으로 듣기만 한 것과 시각으로 확인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정말이지 여자 친구랑 여행 가서 젖은 종이처럼 찰싹 붙어있던 사진까지 걸린 것은 뚜껑을 열리게 하고도 남았다. 그날 남편은 내게 우레와 같은 분노와 맹수의 발톱과 같은 손길을 고스란히 당했다. 결혼 준비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던 나는 며칠을 꼬박 화를 냈다.

4년 전 드라이브 걸렸을 때 이런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남편은 지문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즉시 드라이브 속 사진들을 삭제했다. 하얀 바탕에 청정한 내용의 결혼 준비 자료만 남긴 그의 N드라이브를 보여주며 내 분노가 사그라지길 기다 그는 ‘진짜 순종이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이다.


당시에 드라이브를 깨끗이 비웠으니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일은 지나고 나니 우리에게 소소한 웃음거리가 됐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다. 결혼 4년 내내 생각지도 못했던 드라이브 하나는 우리 눈을 피해 숨어 살고 있었다. 바로 구글 속에서.


4년 전 걸린 것은 N드라이브였고, 그에게는 핸드폰과 동기화된 구글 드라이브가 하나 더 있었다. 평소 N드라이브를 쓰던 남편은 자료를 업로드 해 옮길 일이 생기자 간만에 구글 드라이브를 열어 자료를 넣기 시작했다. 때마침 옆에 있던 나를 불렀다.

“여보, 이거 나 구글 드라이브인데. 여기 나 졸업사진도 있네!”


간만에 드라이브를 열어본 그는 오래전 대학 졸업사진이며, 친구들과 풋내 나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찍은 지 십 년은 족히 된 사진 속 남편과 친구들은 굉장히 헐렁한 바지에 이젠 돈 주고 입으라고 해도 입지 않을 법한 티셔츠를 걸치고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시절 남편 친구들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발이 오그라들만한 사진들을 보며 함께 깔깔거리던 나는 봐서는 안 될 사진을 목격하고 말았다. 유리창에 비친 실루엣이었는데, 앞쪽에 자그마한 여자가 있고 뒤쪽에 내 남편이 보였다.

“여보, 이거 누구야?”

그 순간 남편의 동공이 광속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그러게, 누구지?”


아차, 싶었는지 남편은 슬그머니 구글 드라이브를 끄기 위해 마우스에 손을 댔다. 그 모습을 넘겨줄 내가 아니었다.

“그 손 가만있지 못해?”

마우스 권한을 뺏긴 남편의 동공은 계속 지진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사진을 넘겼다. 예상대로 그 사진은 남편의 옛 애인과의 추억이었다. 둘이 손을 미어터지게 잡고 있는 사진,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찍은 사진, 옛 애인이 적은 손 편지를 고이 찍어둔 사진 등이 걸려들었다. 결혼 전 한 번으로 깔끔하게 끝났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아주 활짝 열렸다. 판도라의 상자는 희망이라도 있지, 이건 후폭풍만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였다.

아이고 두야

일단 남편에게 직접 진상을 들어야 했다.

“이 사람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야.”

어라, 시치미 떼시겠다니.

“아하, 모르는 사람하고 손도 잡고 놀이동산을 갔어?”

“어? 그 손 내 손 아니야!”

“그럼 이 손 편지는?”

“어? 그거 내 것 아니야!”


당황한 남편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막무가내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겼다. 아무리 추궁해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사진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기고 말을 돌리려고 했다. 그럴수록 내가 맹수처럼 돌격하니 나름의 항변을 시작했다.


“아니, 나도 이 사진들이 남아있는지 몰랐다니까! 나는 다 지운 줄 알았어.”

“모르면 다야? 몰랐으면 괜찮아?”

“그런 건 아닌데…. 이미 지난 일이니까….”

“지난 일이면 그냥 다 괜찮아? 걸리질 말았어야지!”

“그럼 여보는 내가 예전에 여자 친구를 사귀었던 게 싫은 거야, 걸린 게 싫은 거야?”

“둘 다 싫어!”

“그렇게 치자면 여보도 남자 친구 있었잖아!”


이 말이 도화선이 돼서 나는 맹수로 돌변했다. 그의 등짝에 구멍이 나도록 때렸다. 결국 남편은 다시 드라이브를 청정하게 세탁했다. 내 화가 사그라질 때까지 곁에서 사근사근 심부름을 하고 비위를 맞춰가며 맹수 잠재우기에 나섰다. 그 와중에 반성문도 썼다.


그런데 온몸에 불이 난 것처럼 화가 나면서도 사실 나는 남편 말대로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건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싫은 걸까, 내 눈에 걸린 게 싫은 걸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게 싫었다면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남편을 만나기 전 누군가와 연애를 했고, 그런 사실 쯤이야 남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 눈에 걸린 게 싫었다면 과거 누나, 동생 하며 지내던 시절 남편에게 여러 차례 옛 남자 친구와의 모습을 보여줬으니 이 역시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끓는 속이 멈추질 않아 그날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배우자의 추억은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그게 말처럼 글처럼 쉽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런 감정을 쉽게 잠재우고 ‘추억을 존중’한다는 미명으로 가다듬을 수 있다면 그건 인조인간이 분명하다. 보통의 사람이니까, 보통의 배우자니까 상대의 지나간 연인에 대해 화도 나고 불쾌하고 따질 수도 있는 거겠지.

다음날 아침, 나는 미워 죽겠는 남편이지만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회사에 보냈다. 어쩐지 평소보다 남편이 아침상을 굉장히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 같았다. 그를 보내고 텅 빈 거실에 앉아 창가 화분들을 바라봤다. 지금 현실에는 나와 남편이 있다는 것, 여기에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견고한 우리의 생활과 연륜이 있다. 지나간 추억이 감히 끼어들 재량이 안 되는 이 현실을 살고 있으니 화가 난들 나는 그를 결국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나간 추억 속 그녀들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소중한 현실을 살고 있을 터였다.


덧붙이자면 이 글을 읽은 남편들 중 누군가 과거 사진을 걸리면 괜히 강하게 나가거나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일은 피하길 권한다. 세상에 없을 빛의 속도로 사과하고 음료수 한 잔씩 떠다 바치며 아내의 평화를 기원할 것. 그것이야말로 과거를 걸린 남편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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