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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10. 2017

무릎이 아픈 이유

욕심 때문에 다쳤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곳은 첫날부터 그토록 싸늘했다. 몇 번의 직장을 거쳐 도달한 신문사. 대학 시절부터 언론사에 들어간다면 이곳에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교수님의 엉뚱한 추천까지 받아 입사한 신문사였다. 몇 년간 잡지사에서 일하며 소기의 목표를 정한 게 있다면 매일 인쇄를 하는 지면, 신문사에 들어가 신문의 잉크를 느끼고 싶다는 것이었다.


잡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잡지의 기사는 어쩐지 새롭지가 않았다. 한 달간 잘 써둔 기사를 적당히 묶어버리면 잡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월초의 기획에 따라 취재를 하고 기사를 만든다. 하지만 매일의 현장을 쫓기듯 신속하게 써 내리는 일간지에 대한 환상은 언제든 이마에 각인돼 떼어 낼 수 없었다.


몇 년 만에 들어간 신문사였다. 온정이 넘치는 회사 분위기는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곳은 매우 싸늘했다. 연예부가 아닌 이상 언론사란 싸늘한 곳이다. 드라이아이스의 허연 냉기가 감돌 듯, 그곳은 그러했다.


3층 단독 건물에 있던 신문사의 2층은 내가 속한 보도국이었다. 보도국 2층의 공기에는 감기균이 항상 상주해있는 기분이었다. 충분히 난방을 해주고(가정집을 개조한 형태라 따끈하게 보일러를 틀곤 했다), 공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앉아 숨의 열기를 뿜는데도 싸늘함은 계절과 관계없이 보도국을 누르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나는 기사를 쓰면서 촬영도 잘 하는, 사실은 촬영에 욕심이 있는 기자였다. 두 가지를 다 잘하면 좋은데, 가끔 한쪽의 감각이 부족할 경우 윗선에서 부실한 평가를 내주곤 한다. 그래서 기사는 누구보다 빠르게, 핵심을 잘 짚어 쓰려했고 촬영도 스스로 인쇄 전 보정까지 마무리할 정도로 잘 해내고 싶었다.


게다가 남자 기자들이 수두룩한 사이에 유일한 여자 기자로 생활하면서 허구한 날 군대를 다녀와야 일 좀 한다는 둥의 빈번한 성희롱이 있었다. 그들보다 내가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과 이 자신감이 빛을 발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욕심을 다그쳤다. 욕심은 변수를 부른다. 알면서도 그랬다.


어느 겨울이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고, 오리털 코트를 입고 두툼한 등산양말과 운동화를 신었다. 취재와 촬영, 모두 잡힌 날이었다. 출입처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었고, 규모가 큰 신문사들의 자리가 앞에 배치되는, 다시 말해 내가 속한 중견 신문사는 중간쯤의 자리에 배정돼 기를 쓰고 사진을 찍는 그런 날이었다. 이를 앙다물고 집을 나선 기억이 난다.


양 어깨에 멘 백팩에는 기사를 바로 송고하기 위한 노트북이 들어있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얇은 노트북은 없었다. 두툼하고 큼직한, 어느 집에나 있는 컴퓨터를 반쯤 압축시켜 갖고 나올법한 큰 노트북이었다. 거기에 촬영을 위한 DSLR 카메라와 삼각대를 넣은 가방을 옆으로 메고 있었다. 메고 있는 장비의 무게만 합쳐도 15킬로그램쯤 됐다.

다행히 지금은 슬림한 노트북을 쓴다.

그날의 취재는 예상대로 버거웠다. 출입처 사람들은 앞줄에 앉아있는 대형 언론사 기자들의 질문만 받는다. 아무리 손을 들고 먼저 표시를 해도 소용없다. 게다가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여성 기자가 드는 힘찬 손은 남성 기자가 드는 핏줄이 불거진 굵직한 손을 이기기 어려웠다.


덩치 큰 남성 기자들 틈을 비집고 사진을 찍었다. 출입처 기자실에 남아 노트북에 받아 적은 오늘의 발표 내용을 정리했다. 사진도 바로 보정했다. 신문사 사이트에 기사를 붙여 넣고 사진을 넣어 비공개 상태로 저장한 후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검토를 요청했다.


오케이, 회신을 받고 바로 퇴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가 되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싶었다. 구태여 돈을 주고 먹는 밥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날이 있는데, 그날도 그런 예감이 있었다.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전철을 갈아타고 버스까지 포함해 2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전철에는 사람이 꽉꽉 빈틈없이 차있었다. 테트리스 게임의 완벽한 짜임처럼 비집을 틈 따위는 없었다. 전철을 두 대쯤 보내고 나서야 약간의 빈틈을 얻어 전철에 탔다. 선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환승을 하며 빈 공간이 조금 생긴 뒤, 나는 옆 칸으로 이동했다. 옆 칸으로 이어지는 전철과 전철의 연결고리, 쇠판으로 이어진 연약한 이음새. 그곳에서 나는 대차게 넘어졌다. 내 발에 내가 꼬인 것 같다. 잠이 덜 깼는지도 모른다. 너무 추웠던 탓에 몸이 경직됐을 가능성도 있고, 짊어진 장비들이 내 몸에 적정히 붙어있지 않고 위태롭게 매달려있다 어딘가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크게 넘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코끝이 전철의 바닥에 붙어있었다. 온몸이 바닥에 고꾸라지는 꽝 소리와 함께,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도 부서져라 소리를 내며 내 손을 빠져나갔다. 아픔을 느끼기 전에 나는 카메라와 삼각대부터 주웠다. 회사기물이기도 했지만, 열심히 일한 나의 순수한 노동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다. 분신이었다. 얼른 주워 들어 얼른 어깨에 멨다. 양쪽 전철 칸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 꽂혔다.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다. 내릴 곳이 아닌데 다음 정거장에 내려 잠시 서있었다.


서있는 동안 무릎이 크게 다쳤다는 느낌이 왔다. 무릎뼈가 내려앉는 듯이 힘이 쪽 빠지고, 통증이 무릎과 그 주변에 불길하게 퍼졌다. 그 넘어짐이 기자생활을 마감하는 도화선이 됐는지도 모른다. 너무 아파 바닥에 쪼그려 앉아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몸이 다치고 밀리고 힘에 부쳐가며 사는 것이, 커다란 신문사에 가지 못한 나의 질문은 원래 없었던 것인 냥 증발되는 것이, 원하던 삶인지.


결국 도화선은 당겨졌다. 꼭 다쳐서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신문사의 좋지 않은 자금 사정과 고민이 겹쳐진 탓이었다. 하지만 그날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매일 아침 욕심부리며 출근하는 나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넘어진 무릎은 예상대로 크게 다쳤다.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인대가 파열되고 물이 차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3개월간 받았다. 의사는 다 낫고도 종종 아프고 다칠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지금도 무릎이 종종 아프고 다치며, 우습게도 비나 눈이 올 무렵이면 시큰함이 더한다.




아픈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나처럼 어떤 계기로 상처받은 이가 대부분이 아닐까 한다.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할까? 그래서 비나 눈이 올 무렵에, 혹은 특정 음식이 눈앞에 놓였을 때, 아침 출근 전 현관에서 신발에 발을 넣는 순간의 촉감에 상처가 떠오르고 온몸의 감각이 부르르 떠는, 그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로 보유돼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 산책을 오래 하지도 않았는데 무릎이 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릎이 아파 멀지도 않은 거리에 택시를 탔다. 전철의 이음새에서 넘어진 나의 뒷모습이 궁금해졌다. 카키색 오리털 코트를 입은 몸이 잠시 붕 뜨고 다시 바닥에 낙하하며 보인 신발의 바닥이라던가, 멀어진 카메라 가방의 상표라던가, 울고 싶은데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던 나의 곤혹스러운 얼굴이라던가.


어제의 통증은 오늘 아침 비가 내리는 풍경으로 검증을 마쳤다. 그리고 세상엔 나처럼 비를 보며 ‘역시 그랬군’하고 담담히 시선을 내리까는 이들이 많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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