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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08. 2017

아이스크림 시위

연인의 아이스크림 취향을 알고 있나요?


남편은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한다. 연애 시절에 허기질 무렵 밥을 먹자고 하면 빙수나 아이스크림을 밥 대신 먹자는 소릴 자주 했다. 처음엔 나를 놀리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좀 더 지내고 보니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남편은 진심으로 밥 대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거였다. 달콤하고 시원하고, 밥 보다 좋다는 아이스크림과 빙수. 힘들게 씹을 필요 없이 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 가끔 “아이스크림 사줄까?”라고 말하면 남편의 가장 천진한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도 아이스크림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여름철이면 하루에 아이스크림 한 개 정도는 꼭 먹는 편이고, 건조한 봄가을엔 까슬한 목을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는 느낌을 좋아한다. 겨울엔 훈훈한 이불 위에서 큰 용량의 아이스크림을 쟁반에 받쳐놓고 스푼으로 소복이 떠먹는 것을 즐긴다. 


순수하게 아이스크림만 먹는 순간을 좋아하므로 과자가 들어간 콘은 먹지 않는다. 먹더라도 과자 부분을 떼 버리곤 하는데 아깝기도 하고, 남들 앞에선 음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조금 민망하다. 색소가 많이 들어간 과일맛 아이스크림과 신맛 나는 아이스크림은 손이 가지 않는다.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적당히 좋다. 단 맛이 적은 아이스크림이면 더욱 좋다.


남편은 초콜릿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소프트 콘도 매우 좋아한다.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파는 메뉴 중 치즈가 듬뿍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발을 동동 구르도록 좋아한다. 민트 맛을 특히 좋아하고, 쿠키나 크런키가 들어가 씹히는 맛이 좋은 아이스크림도 즐겨 먹는다. 단 맛이 적은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단 맛이 강할수록 크게 만족한다.




우리의 아이스크림 취향은 분명한 편이고, 결혼해서 3년쯤 살았으니 서로 알기 쉬운 음식 취향 정보가 아닐는지.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 다녀온다는 남편에게 카드를 줬다.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여러 개 사와.”

“자기는 뭐 먹고 싶은데?”

“음, 내가 좋아할 만한 거 적당히 사와. 내 취향 알지?”

“응! 알지!”


남편은 신나서 집을 나갔다. 잠시 후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봉지 들고 싱글벙글한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봉지 속 아이스크림을 살펴봤다. 나는 이내 실망했다. 내가 먹지 않는 아이스크림 콘, 색소가 잔뜩 들어간 신맛의 아이스크림과 남편이 좋아하는 쿠키가 들어간 아이스 바만 가득 있었다. 내 취향도 잘 알거라 기대했던 마음이 쪼글쪼글 주름지고 있었다. 


“여보, 나 먹을 아이스크림은 어떤 거야?”

“거기 그 신거, 그거 먹어.”

“여보, 나 신맛 싫어해.”

“그럼 콘 먹어.”

“여보, 나 콘 안 먹는데.”

“그래?”

“여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어떤 건지 혹시 아는 거 있어?”

“......”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내 취향을 알지 못했다. 3년을 살며 그의 선택, 그의 입에 오물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취향을 살피고 맞춰 장을 보고 요리를 해주던 나는 서운함의 뚜껑이 열렸다. 


“어떻게 3년을 살았는데, 내가 무슨 아이스크림 좋아하는지도 모를 수 있어?”

“여보, 신 거 좋아하지 않아?”

“나 신맛 싫어한다고! 신 거 안 먹어!”

“......”

“내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라도 말해볼 수 있어?”

“......”


남편은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앉아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관심을 갖고 취향을 파악했다고, 그가 똑같이 날 파악할 의무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삶에 별다른 영향도 미치지 않는 아이스크림 취향에 마음이 틀어졌다. 


사랑하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사랑하니까 너도 내게 같은 크기의 사랑으로 보상해 달라는 억지를 부리며, 나는 ‘아이스크림 단식 시위’를 벌였다. 옹졸하게 “이거 너 다 먹어!”도 외쳤다. 


지난 여름 휴가 때 오타루에서 먹은 녹차 아이스크림. 아주아주 내 취향이었다.


며칠 뒤, 산책에서 다녀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우리 각자 취향의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보여주자고, 이렇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자고. 나와 남편은 조그만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마음에 드는 아이스크림을 몇 개씩 담았다. 계산대에 가기 전 서로의 바구니를 보여줬다. 


“여보, 난 이런 걸 좋아해. 신맛은 안 먹고, 색소가 많이 들어간 건 싫어해. 콘도 안 먹고 바닐라나 부드러운 맛, 너무 달지 않은 것을 먹어.”

“그랬구나, 기억해 놨다가 다음엔 이렇게 사갈게.”

“여보가 고른 아이스크림도 볼래. 음, 역시 예상한 대로야!”

“난 네가 사 온 거 다 맛있던데!”

아이스크림 단식 시위는 이날 종료했다. 


시위는 종료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엉뚱한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 내가 남편을 파악하는 속도와 남편이 나를 파악하는 속도가 현저히 다르다는 걸 아이스크림으로 알았다. 우리가 동일인물이 아닌 이상 너무나 당연한 이 속도에 나는 가끔 억지를 부리긴 한다. 알면서 부리는 억지다. 남편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남편이 내 취향에 꼭 맞는 아이스크림을 사 오면, 기특함과 약간의 허무함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른 종목의 취향을 알아보라는 요구를 할지 모른다. 다른 부분에서도 나를 좀 더 알아봐, 좀 더 탐구해줘, 라며. 사랑하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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