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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16. 2019

오늘의 경험에 감사해

편견 없는 테이블 매너를 배우다.

고정적인 자리가 있는 정규직 생활에 비해 나의 프리랜서 생활은 경험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그 경험 중에는 아무리 균형을 잡아당기려 해도 수평을 만들기 어려운 ‘편견’을 다듬어준 일들이 있다. 오늘 이야기는 장애인을 지원하는 NGO의 취재에서 겪은 일이다.


한 달 치 취재 스케줄을 받아 일정을 조율하던 날이었다. 그중 한 곳은 내가 사는 파주였다. 이왕이면 가까운 취재 장소로 가고 싶어서 담당자에게 의견을 전했고, 담당자는 해당 일정에 나를 배정했다.


취재 당일, NGO의 담당자와 찾아간 곳은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도와주는 센터였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는 약 10분 거리, 택시로는 5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센터의 존재를 모를 만큼 내가 주변에 무심했다는 데 조금 흠칫했다.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센터로 걸어 들어갔다. 나와 담당자를 안내한 센터의 간사는 비장애인이었지만, 센터를 이끄는 센터장은 뇌병변 장애인이었다. 어쨌든 센터장은 간사의 상사였고, 간사는 상사에게 깍듯이 우리를 소개하며 인터뷰에 동석했다.  

NGO와 동행하며 취재는 수없이 다녔고,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마주했다. 그중에서도 인터뷰가 가장 어려운 케이스는 뇌병변 장애인이었다. 장애의 경증과 중증을 나누거나 종류에 따라 응대법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인터뷰를 이끄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뇌병변 장애인이 가장 어려웠다.


아무리 집중해서 들어도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란 워낙 고난도기 때문이다. 뇌에 기질적 장애를 가졌으니 의지대로 말이 유창하게 나오지 않고, 말하는 내내 몸이 수시로 움직이기 때문에 대화가 툭툭 끊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며 익숙해진 동료 중 비장애인이 있으면 곁에서 말을 전달해주거나 대신 인터뷰에 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날은 우리를 안내해준 간사를 비롯해 아무도 대신 전달하거나 답하지 않았다. 그저 센터장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할 때까지 곁에서 차분히 기다릴 뿐이었다.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아 적던 나는 의아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일었다.

‘나 진짜 알아듣기 어려운데 좀 도와주시지. 오늘은 아무도 안 도와주시네.’


하지만 답변이 조금 느리고, 부정확하더라도 장애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이들의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나의 성급함은 차츰 잦아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인터뷰이였던 센터장이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애써가며 성실하게 답변했기 때문이다.


센터장은 어릴 적 뇌성마비를 앓고 장애를 얻었다고 말했다. 말로 설명조차 어려운 성장기를 지나왔고, 사회 구성원으로 일을 하며 장애인의 자립을 진중하게 고민한 그였다. 그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센터를 설립했고, 함께 뜻을 펼쳐나갈 간사들을 모집했다. 문제는 운영이었다. 갓 설립한 센터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상태라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후원금으로 어렵게 장애인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좋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간사들의 월급을 제때 쥐어주지 못해 센터장은 마음에 짐을 가득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간사들에게도 고난의 시간이었다. 월급을 제때 못 받고 2년을 꾹꾹 눌러 버텼다. 2년쯤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장애인의 자립성과를 조금씩 낼 수 있었고, 운영의 틀이 조금씩 마련되면서 지원금과 후원의 길이 조금씩 열렸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센터장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 뜻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는 온몸에 힘을 줘가며 말했다.

그때 생각하면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해요. 우리 간사들이 떠나지 않고 함께 해줘서 지금 이렇게 장애인들을 교육하고 사회로 이끌 수 있었어요.”


2일도, 2개월도 아닌 자그마치 2년이었단다. 2년간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직장에서 간사들은 자원봉사자처럼 일했고, 센터장은 넉넉지 않은 사비를 털어 센터를 꾸려갔다. 순간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가정이 있는 자로서 센터를 운영했던 그의 양어깨가 얼마나 짓눌렸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니 인터뷰 초반에 서운해 한 나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른다.

‘2년을 그렇게 고생한 사람들 앞에 두고 나는 20분도 채 안돼서 알아듣기 어렵다며 속으로 툴툴댔구나.’


그러고도 한 시간 가량 인터뷰는 지속됐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센터장의 몸은 단 1초도 멈추지 않았고, 가까이 앉은 내 얼굴과 답변을 기록하던 노트북과 그것을 누르는 내 손가락에 계속 침이 튀겼다. 다만 초반에는 다소 거북했던 이 상황은 대화하면 할수록 가벼운 해프닝으로 색을 바꾸고 있었다. 침이 튀긴 건 끝나고 닦으면 되고, 말을 잘 못 알아들으면 한 번 더 답변을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서운하고 어려울 이유가 전혀 없는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를 하며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센터장과 간사들이 우리를 만류했다.

“식사하고 가세요. 마침 식사시간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센터의 한편에 주방이 있고, 간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원수에 맞춰 준비했을 텐데 손님이 식사에 끼면 다들 식사량이 부족해질까 조심스러웠다.

“아니에요. 인원수 맞춰서 준비한 식사에 예정도 없이 저희가 낄 수 없어요.”

그랬더니 간사는 나와 담당자의 손을 잡아 식탁으로 끌었다.

“넉넉히 했으니 걱정 마세요. 게다가 오늘 메뉴 스파게티거든요. 진짜 맛있어요!”


손에 이끌려 나가 보니 둥근 테이블 여럿이 놓인 공간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데 섞여 앉아 그날의 점심 메뉴인 토마토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역시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입가와 손에 음식을 묻히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거나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묻은 건 닦으면 되고, 떨어진 건 주우면 그만이다. 식사가 늦어지면 천천히 먹거나 기다리면 된다는 무언의 배려가 테이블마다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센터장과 센터에서 교육을 받는 몇 명의 장애인이 함께 앉았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달팽이 농장 운영이 있었다. 장애인들이 직접 식용 달팽이를 키우고, 판매까지 마무리해 수익을 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달팽이 키우는 기술은 안전한 편이라 장애인들이 배우는 데 무리가 없었고, 손수 돈을 벌며 자립을 시도하는 기특한 프로그램이었다. 내 옆에 앉은 장애청년도 달팽이 농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스파게티를 먹는 내내 웃으며 낯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뚫어지도록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드디어 마음을 먹었는지 말을 걸어온다.


“내 이름은 OOO이에요. 나이는 OO살이에요.”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과 나이를 말하며 인사하라고 배운 모양이었다. 나도 똑같이 응대했다.

“내 이름은 도란이에요. 나이는 OO살이에요. 나이가 좀 많죠?”

나의 화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청년이 해사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리고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듯 제안을 한다.

“우리랑 내일 달팽이 농장에 가요.”

“달팽이 농장?”

“네! 우리랑 내일 달팽이 농장에 가요. 우리랑 같이 가요.”


얼굴 가득 자부심을 드러내며 청년은 내게 달팽이 농장에 함께 가자고 했다. 주변에서 그 말을 듣더니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우리 OO이가 작가님이 마음에 드나 봐요. 농장에 같이 가자고 하고.”

나 역시 기분이 좋아져 거리낌 없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달팽이 농장에.”

내 대답에 흡족한지 청년은 우쭐우쭐 웃어가며 남은 스파게티를 맛있게 비웠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식사를 즐겼다.


이날의 취재가 있기 전, 나는 스스로를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해왔다. 그러면서도 식당에서 우는 아이를 보면 찌푸렸고, 장애인을 보면 ‘불편하겠다.’고 지레짐작했다. 노키즈존을 선호했고, 흘리고 묻히며 먹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흉을 봤다. 대화가 유창하지 않은 장애인과의 대화는 시작부터 어려워했다. 그랬던 나는 얼마나 편견에 젖어 살았던 걸까.


식사를 마치고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센터를 나왔다. 인터뷰를 안내해준 간사가 나와 담당자를 인근 전철역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차 안에서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식사 제안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아유, 맛있으셨다니 저도 좋네요. 나중에 정말 달팽이 농장도 구경 오세요.”

대화중에 나는 차마 부끄러워서 말로는 못 꺼냈지만, 마음으로 또 다른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오늘의 경험에 감사해요. 저의 편견 앞에 거울을 비춰주셔서 정말 감사한걸요.’


이날로부터 나는 편견 없는 테이블 매너를 갖추기 위해 항상 마음을 다잡는다. 침이 좀 튀더라도, 왼손잡이가 식사 내내 건드려도, 주룩주룩 음식을 흘려가며 먹는 누군가 있어도, 말을 못 알아들어 되묻는 한이 있다 해도 어떠한가. 나는 그날의 인터뷰에서 서로의 사이에 어떤 장막도 내리지 않은 채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테이블 매너를 배웠다.      


지적장애인에게 “다음에 또 보자.”, “함께 어디에 가자.” 등의 약속은 안 좋다고 합니다. 저는 취재를 위해 한 번 방문하고 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상대는 그 약속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기다리느라 상처를 받게 되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다고 나중에야 들었어요. 그래서 달팽이 농장에 가겠다고 말해놓고 못 간 것이 미안해졌고, 앞으로는 꼭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면 쉽게 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년 상반기에 두번째 책이 나옵니다. 사실 이 글은 그 책에 넣을 초고로 작성했는데, 첫 책에서도 그러했듯이 초고를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빼기로 한 원고입니다. 어쩌면 저의 몹시 부끄러운 이력이면서 소중한 경험이라 책에는 넣지 않더라도 누군가와 꼭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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