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Aug 11. 2019

모카의 편지

여름이 언니, 편히 지내고 있나요?

여름이 언니, 저는 모카예요.

저는 6월 초부터 아빠, 엄마와 살고 있어요. 아, 언니는 엄마가 결혼 전에 키우던 강아지였으니 아빠는 모르시겠군요.

2개월차의 모카

저는 낳아주신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과 다복하게 지내다 2개월을 갓 채우고 아빠, 엄마에게 왔어요. 가끔 그때가 생각나곤 해요. 검은색, 갈색의 털색을 가진 형제, 자매들과 어울려 놀다 낮잠을 자던 날이나 양말 하나를 가지고 모두 달려들어 놀던 때도 그렇고.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겠지만 태어나 만나는 환경을 선택할 수 없기에 그것들이 좋았다고 느끼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미용 전 털이 많이 자란 상태의 모카

언니도 형제, 자매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4마리의 남매 중 언니가 두 번째로 태어나 이름이 여름이었다고요. 엄마에게 듣기로 여름이 언니는 아마 알파가 아니었을까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지랄견으로 유명한 견종이었다 해도 좀 심했잖아요.


가족들 구두는 맛있게 뜯어먹고, 엄마가 어렵게 구입한 특별판 운동화도 다 찢어놨다고요. 쌀자루를 뜯어 생쌀을 잔뜩 먹은 건 충격이었어요. 온 집안의 벽지도 다 뜯었다면서요? 저는 이 집에 와서 호기심에 손가락만큼 벽지 뜯었다가 벼락 맞는 줄 알았어요. 그 바람에 어엿한 집이 생긴 건 좋았지만, 아직도 벽이나 몰딩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엄마가 달려온답니다.

미용 후 단정해진 모카

엄마는 저와 언니를 많이 비교해요. 물론 질투 나거나 불쾌하진 않아요. 언니는 이미 15년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비교의 내용이 저를 낮춰보는 게 아니라 괜찮아요. 엄마는 주로 이런 비교를 해요.


“모카 간식은 이렇게 종류가 많은데 여름이 키울 땐 이런 게 별로 없었지.”

“모카 장난감은 이렇게 많은데 우리 여름이는 장난감도 얼마 없었네.”

“여름이는 산책 나가면 한 번도 걸은 적 없고 붕붕 날기만 했는데 우리 모카는 걷기도 잘하네.”


이런 종류의 비교라서 괜찮아요. 언니가 세상을 뜬 지 15년이나 됐다는데 엄마는 여전히 언니 생각을 많이 하나 봐요. 아마 언니가 아프게 떠나서 그런 거겠죠.

새침모카

엄마는 여전히 언니에게 미안한 게 많대요. 살찔까 봐 사료 많이 못 줘서 미안하고 약속했던 바다에 데려가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산책 매일 못 시켜줘서 미안하고, 미안한 것 투성이라 여전히 마음이 아프대요. 언니가 사고로 떠났다는 이야긴 들었어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언니의 가슴 줄이 끊겼다고요. 물건이 불량이었을 수도, 혹은 언니가 워낙 활달해 줄이 끊길 정도로 움직인 건지도 몰라요. 갑작스러운 죽음의 원인을 우리가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우린 어디까지나 사실에 가깝게 추측할 뿐이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저를 혼자 횡단보도에 세워두지 않아요. 아직 한 번도 횡단보도의 하얀 선을 밟아본 적이 없어요. 차가 보이는 길에선 항상 안고 가니까요. 외출 전에는 가슴 줄을 여러 번 확인해요.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엄마 머릿속에 횡단보도 근처의 강아지는 위험하고, 가슴 줄을 안 쓸 수는 없지만 못 미덥고, 언니를 뺑소니치고 가버린 택시처럼 세상의 택시들이 모두 원망스러운가 봐요. 엄마가 그랬어요. 언니를 치고 간 택시는 주황색이었다고. 그래서 저를 안고 길을 건널 때 주황색 택시를 보면 여전히 엄마는 움찔거려요.

참 길기도 하다..

그래도 저는 지금이 좋아요. 겁 많은 엄마가 있고 저로 인해 행복이 100% 채워졌다는 아빠가 있으니까요. 하루 세 번 맛있는 사료를 먹고, 매번 조금씩 다른 간식을 먹고, 해가 지면 공원에 나가요. 산책은 아빠랑 자주 가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랑 세 가족이 나가는 산책이 더 좋아요.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하고 인사도 조금씩 하고요. 다른 견생은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지금 제 삶은 정말 편안해요. 저로 인해 엄마, 아빠도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딱 한 장 남아있는 여름이 사진

그러니까 여름이 언니, 제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언니, 엄마 꿈에 다시 나와 주면 안 돼요? 제가 온 뒤로 언니가 꿈에 안 나온다고 엄마가 울었어요. 아빠의 행복은 100%지만 엄마의 행복에는 언니의 기억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 비록 먼 하늘에 있어도 한 번씩 엄마 꿈에 나와 주세요. 예전처럼 꿈에 나와서 사람 말도 하고, 유치원에 간다고 떼쓰고, 엄마 팔 베고 낮잠도 자고 말이에요.

엄마 꿈에 꼭 나와 주세요, 언니.

매거진의 이전글 반갑고 철렁한 연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