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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02. 2019

반갑고 철렁한 연락

내가 반가워하는 만큼 친구들도 내 연락을 기쁘게 받아주지 않을까?

밤 10시쯤, 어지간히 급한 용무가 아닌 이상 타인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시간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란아, 책에 사인은 언제 해줄 거야?”

너무나 뜬금없는 메시지 창이 떠있다. 오랜 친구로부터 1년 만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더라?’


메시지 창을 위로 올려 날짜를 보니 작년 이맘쯤, 내 첫 책이 나왔을 때 연락한 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책 이야기보다는 서로의 안부로 이야기 나누다 마무리된 터라, 책이며 사인이며 하는 이야기가 뜻밖이긴 했다.

“그러게, 만나야 사인을 할 텐데ㅋㅋ”


나는 연고가 없는 파주에 살지만, 친구들 중에는 나고 자란 인천에 쭉 사는 이가 많다. 인천에서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인천에 사는 남성과 결혼해 자리 잡은 친구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처를 옮기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러했다면 여전히 인천에 살 텐데 이방인의 삶을 즐기다 보니 연고 없이 이곳저곳 내키는 대로 살 곳을 정하고 있다.

친구는 내 책을 읽어본 모양이었다.

“읽어봤는데 재밌더라. 아직 파주?”

아마 오랜 세월 한 곳에 터를 잡은 친구들에겐 내가 사는 파주가 ‘아직’이 붙을 만큼 낯설 만도 하다.


“응, 파주 살지. 넌 OO 산다 그랬지?”

“응, 나도 그대로.”

“담엔 내가 OO으로 갈게. 공항철도 타니까 OO 금방 가더라.”

그러다 늘 비슷한 질문을 말했고, 비슷한 답변을 기대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이렇게 물으며 “나야 똑같지.”, “늘 비슷하지 뭐.” 등의 대답을 짐작했지만 예상치 못한 답을 들어야 했다.

“이번에 큰 수술하고 쉬고 있었어. 수술은 저번 주에 했고 지금은 회복 중이야.”

당황스러운 답이었다. 오래간만에 연락해서 어떤 병인지, 어떻게 아팠는지 구구절절 캐묻기 무안해서 적당한 선에서 안부 몇 가지를 물었다. 수술을 받을 땐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다 나도 모르게 푸념 비슷한 소리도 했다.

“우리가 건강 걱정할 때가 되다니 이상하다.”

“그러게, 평생 건강할 것만 같았는데. 나이는 못 속이나 봐.”


친구와 안지 어느덧 21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인생에서 맞닥뜨릴 몇 번의 고비를 안부로 전하기까지의 세월 21년. 자신을 단장할 줄 몰라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던 나와 달리 늘 다정하고 착한 마음을 품었던 친구와의 추억들이 아리게 떠올랐다.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 집에 여럿이 모여 공포영화 비디오를 빌려보던 날, 친구 아버지가 싸준 삶은 계란을 쉬는 시간에 함께 까먹은 일이며, 고등학생이면서 하교 길에 중학생에게 삥을 뜯겼다고 내게 몰래 털어놓은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그런 추억만 붙잡고 살기엔 이제 친구에겐 책임질 자녀가 둘이나 있고, 나 역시 나름의 책임과 바쁜 일상으로 잘해봐야 일 년에 한 번 연락하는 정도였다. 그 와중에 친구는 일생의 고비 중 이미 한 번을 거친 듯했고, 조금 여유로워진 회복기에 다다라서야 옛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했나 보다.

이렇게 어쩌다 오는 연락, 뜸했던 친구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당황스러운 가운데 참 기쁘다. 그러면서 먼저 연락하기란 어쩜 그리 어려운지. 먼저 연락한다고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닳을 것도 아니고, 자존심에 치명타가 와서 앓아누울 것도 아니면서 그 쉬운 안부 연락 한 번이 참 어렵고 쑥스럽다. 내가 그리 기쁘고 반가워하는 만큼 아마 친구들도 내 연락을 기다리고 기쁘게 받아주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친구의 이름을 먼저 부르기까지 참 대책 없이 소극적이다.


친구는 아직 회복기지만 어린 자녀들을 챙기는 몫을 내려놓진 못한 모양이었다.

“란아, 나 이제 애들 재우러 가야 해. 또 연락하자!”

“그래, 잘 자!”

끝으로 친구는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너에게 꼭 사인을 받아야지.”


대책 없이 소극적인 나 못지않게 아마 친구는 일 년 만에 연락한 것이, 출간 소식에 시원하게 축하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던 게 아닐까? 다짐하듯 나를 만나 사인을 받겠다는 친구의 메시지에 웃음도 나고 내내 마음이 쓰렸다.


오랜만에 받은 친구의 소식에 내 얼굴은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지만, 이런 뜻밖의 연락은 반가우면서 가끔 철렁하게 만들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건강을, 연락이 닿지 못해 궁금한 친구들의 편안한 일상을 진심으로 바라며 나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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