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 영화와 관련해 경계령이 내렸다고 한다.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이기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보고 난 이후에 느낀 경계령에 대한 내 정의는 이러했다.
‘약자가 악당으로, 잔잔한 도시가 범죄도시로의 성장기’이기에 경계령까지 내려 “모방하지 말라, 경계하라.” 다그치는 게 아닌가, 하고.
상영 내내 약자의 웃음과 눈물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가슴 아프게 또 치밀어 오르는 공감으로 2시간이 오롯이 채워졌다.
자꾸 아팠다. ‘아서’는 웃기만 할 뿐인데, 그저 웃음을 멈출 수 없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이리 가혹할까. 웃음을 멈출 수 없으면 위험한 사람일까? 아마 웃음을 멈출 수 없는 현상이 포함된 정신질환이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치료를 받아야만 사람들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 수 있다. 그런데 치료가 어렵다. 그 사회의 복지는 엉망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가난하다.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자꾸 웃는 병 때문에 얻어맞는다. 비쩍 마른 몸으로 자꾸 웃음을 유발하려는데 아무도 웃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비극은 이런 약자를 가만두질 않는다. 선량하고 약해 보이던 어머니의 실상을 알게 되고, 자신을 비웃는 권력자들로부터 상처 받고 철저히 밟히고 만다.
그런데 영화에서 약자는 오로지 아서뿐일까? 전철에서 가만히 책을 읽다가 취객의 조롱을 받으며 자리를 피하는 여성, 같은 아파트에 살며 농담을 한 번 받아줬을 뿐인데 스토킹과 주거침입을 당한 여성, 기형적 몸을 가진 이유로 직장에서 멸시와 조롱을 받는 왜소증 직원 모두 약자다. 그리고 상징적인 약자와 은둔형 약자들은 폭력적인 시위를 만든다.
그 약자들 중에서도 저 밑바닥에 있던 아서는 최악의 악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신질환과 가난, 고용 불안정, 세상에 누구 하나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 하나 없는 그는 잃을 게 없으니 가장 극적인 악인이 될 수 있었다.
아서는 머레이 쇼에 나와 “내가 죽었으면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갔을 거야!”라고 외친다. 나는 약자들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젠 기억도 못할 용산참사의 희생자, 고독사하는 독거인들, 구조의 ㄱ자도 모른 채 학대받으며 살아가는 아이들. 그 많은 약자들의 죽음에 짧은 추모는 있겠지만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추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또 아서는 자신의 범죄에 대단한 의미부여나 정치적 사유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는 극빈층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인 이유가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공감과 소름이 동시에 일었다.
“그놈들이 못 돼서, 못되게 굴어서, 무례해서.”
인상깊었던 장면
영화를 함께 본 남편은 조커가 미친 범죄자라고, 공포영화라고 했지만 나는 정반대의 감상으로 공감했다. 흔해빠진 약자가 악당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실상 평범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울분가 분노라는 재료가 있어서다.
게다가 지금처럼 갈등과 차별이 한껏 고조된 사회를 살면서 조커가 우리 사회에 또한 우리 동네에 등장하지 못할 법도 없다. 약해빠진 아서의 경험과 울분에 공감하고, 광기 어린 악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흠칫하면서도 슬펐다.
세상에 절대 강자란 없다. 누구든 약자가 될 수 있는 사회를 살면서 우린 충분히 조커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