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무화과는 조금 반가웠다.
처음으로 내 돈 주고 무화과 한 상자를 사 왔다. SNS를 보면 무화과로 요리한 사진이 자주 올라오고, 베이커리나 카페에 가면 무화과 디저트가 참으로 많기에 휩쓸리듯 사온 무화과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화과를 손질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무화과를 한참 노려보다가 핸드폰으로 검색해 무화과 손질법, 보관법을 읽었다.
그렇다고 무화과 맛을 모르거나 먹어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살던 집의 마당에 과일나무가 꽤 많았는데 그중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늘씬한 기둥과 가지에 잎사귀가 가득 차고, 그 사이사이 어린 내 주먹만 한 무화과가 달려 있었다. 나무 위의 무화과는 주로 연두색이었는데 아랫부분이 갈색으로 여물어갈 때 따먹어야 했다.
물론 따는 일은 내가 할 수 없었다. 무화과는 높은 곳에 달려 있었고, 대추를 딸 때처럼 나무를 흔들어 바닥에서 주우면 안 되는 과일이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뭉개질 만큼 무화과의 피부는 여렸다.
무화과를 따는 역할은 늘 아빠에게 있었다. 아빠는 손으로 익은 무화과를 뚝뚝 땄다. 나무의 나이가 어려서인지 무화과 수확이 늘 풍년은 아니었다. 아빠는 그것을 따자마자 나와 언니들에게 먹였다. 이렇게 단순하게 옮겨 적으면 사랑이 넘치고 아주 다복한 집안의 모습 같지만, 사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 순간이 몹시 싫었다.
아빠는 늘 무화과를 씻지 않고 먹였다. 마당에는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돗가가 있음에도 늘 그러셨다. 내가 씻어야 한다고 하면 그냥 먹어야 몸에 좋다고 하셨다. 물론 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우리 집은 도로와 거리가 먼 인도만 접해있는 주택가 속에 폭 박혀 있었고, 아빠는 과일나무를 키울 때 농약을 친 적이 없다. 하지만 씻지 않아야 몸에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이야. 아빠는 나한테 담배도 몸에 좋아서 핀다고 하셨잖아.’
입 밖으로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지만, 나는 씻지도 않은 무화과가 몸에 좋다는 아빠의 꽉 막힌 지식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화과의 생김새도 퍽 마음에 안 들었다. 갈색으로 여문 무화과의 밑 부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있었다. 사과의 엉덩이와 귤의 머리꼭지에도 이런 것들은 있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어쩐지 몸의 크기에 맞지 않는 그 구멍이 징그러웠다. 어른이 돼서야 안 것이지만 그 구멍은 꽃이 없는 열매의 수정을 도와줄 벌레들이 들어갔다가 탈출하지 못하는 오로지 입구였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직 연두색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부분의 어디까지 먹어야 할지도 어려웠다. 아빠는 줄기 바로 앞까지 먹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항상 근거 없는 지식을 강조하셨다.
“이거 다 먹어야 몸에 좋은 거야.”
그러면서 보는 앞에서 그것을 다 먹는 것을 확인하셨다. 아무리 맛있는 과일이라도 숙제처럼 먹어야 한다면 오죽 맛이 달아나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땀 좀 꽤나 흘리고 먹은 무화과는 달았다. 정말 달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설탕을 친 것처럼 달콤한 맛이라 해서 엄청난 행복이 다가올 정도의 무화과는 아니었다.
그런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서운 아빠는 그저 본인이 키운 열매의 결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무화과를 따먹는 날은 그나마 나와 언니들이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다. 아동기를 지난 이후로는 그렇게 씻지도 않고 강요하듯 먹어야 하는 과일을 제법 거절할 줄 알게 됐으니 말이다. 나는 아빠가 날이 갈수록 고집이 세지고 폭력적으로 바뀌는 만큼 무화과라는 과일이 싫어졌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집에서 열리던 과일이 점점 싫어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감정을 교환한 적 있다. 아빠가 제과점을 하는 친구는 빵이 싫고, 생선가게를 하는 친구는 생선을 싫어하고, 과일가게를 하는 친구는 과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처럼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과일은 먹다 질리거나 다른 과일을 선택할 수 없기에 좋아할 수가 없다.
나는 무화과 못지않게 대추, 포도, 감을 싫어했다. 우리 집 대추나무는 열매가 실했다. 오죽 폼 나게 자랐으면 동네에서 우리 집을 대추나무집으로 불렀을까. 대추가 싫어진 것도 아빠 영향이 크다. 일요일이면 한참 자고 있는 우리 세 자매를 꼭두새벽에 깨웠다. 아빠가 지붕 쪽 난간에서 장대로 대추나무를 털면 우리 셋은 바구니를 하나씩 끼고 그것을 주워야 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깟 대추가 뭐라고, 사람이 덜 다니는 새벽부터 그 고생을 했다.
이 역시 아빠에게는 본인이 생각하는 열매의 아름다운 마무리였을 것이다. 자신이 열심히 키운 과일을 딸들과 함께 수확하는 모습을 꿈꿔왔던 건 아닐까. 우리가 열심히 대추를 줍고 있으면 이웃들이 나와 한 마디씩 부럽다는 소릴 했다. 하지만 나는 아름답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복 바람에 대추를 줍다가 교회 가는 반 친구를 만난 날은 엉엉 울고 싶었다.
대추가 열리기 좀 전엔 마당을 덮은 포도나무의 수확 철이었다. 다행히 이때는 아빠가 간이 사다리를 놓고 포도를 모두 잘라내셨다. 내가 주우러 다니지 않은 건 좋았지만, 포도를 수확한다는 건 향후 한 달간 포도를 열심히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많은 포도가 열렸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는 의무적으로 포도를 먹어야 했고, 그러고도 남는 포도를 엄마는 잼과 술로 만드셨다. 포도를 먹기 싫다고 하면 또 아빠의 근거 없는 지식이 등장했다.
“포도는 많이 먹어야 몸에 좋은 거야.”
하지만 매일 포도를 먹는 날엔 그냥 내 몸이 안 좋아지길 바란 적도 있다. 이렇게 열심히 먹어서 몸에 좋다면 이깟 포도 안 먹고, 그저 그런 몸으로 살고 싶었다. 기껏해야 유치원이나 다닐 정도의 어린 나이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그리고 초겨울 날씨가 들쑥날쑥 다가올 무렵이면 감을 따야 했다. 이것 역시 좀 위험한 거라 아빠가 간이 사다리를 놓고 감을 따셨다. 포도와 마찬가지로 수확의 고됨은 없었지만 감을 수확하면 향후 한 달간 또 열심히 감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 집 감은 부드럽고 연한 홍시가 아니라 딱딱한 단감이었다. 가끔 떫은맛도 나는 단감 말이다.
식사 후에는 또 엄마가 열심히 감을 깎았고, 또 근거 없는 아빠의 지식이 등장하며 감에 질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언젠가 감나무에 병이 들어 사람 놀리듯이 감이 딱 한 개 열렸을 때, 아빠는 분노했지만 나는 속으로 좋았다.
‘아이, 고소하다. 그놈의 감나무 평생 골골거려라.’
바람이 이루어진 건지 정말 감나무는 내가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열매 맺음이 시원찮았다. 아빠는 약도 뿌리고 거름도 주고 나름 감나무를 건강하게 키우려 애쓰셨지만, 감나무는 매년 한 두 개의 감을 겨우 맺고 비실거렸다.
집에서 열리던 무화과나 과일들의 기억은 전부 유년기다. 청소년기로 넘어가면서는 불행한 집안 분위기와 아빠와의 갈등으로 뭘 맛있게 먹고 즐거웠던 기억이 말끔하게 없다. 그 단독주택에서는 13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 집을 나올 때는 어찌나 싫었던지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싫었던 그 집의 대문을 나설 때도 무화과나 대추나 포도는 제 할 일을 하며 열매들을 살찌우고 있었다.
무화과, 대추, 포도, 감. 그러고 보니 모두 가을의 것들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가을이 제철인 과일들이다. 그래서 유독 내 눈에 자주 띄었나 보다. 냉장고에서 무화과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었다. 징그러웠던 무화과 밑구멍에는 물이 들어가면 당도가 낮아져 안 된다고 했다. 흐르는 물에 껍질이 뭉개지지 않을 정도로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칼로 썰어봤다. 아주 작은 수박처럼 속이 빨갰다. 반달 모양으로 잘게 썰어 접시에 담았다.
물기가 많은 과일이 아니라 그런지 무화과는 입안에서 묵직한 달콤함을 퍼뜨렸다. 가을의 맛이자 유년의 맛.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무화과는 조금 반가웠다. 이것으로 토스트도 만들고 샐러드 고명으로도 좋다고 한다. 무화과는 이런 과일이었구나, 하며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 빨간 과육을 한 입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