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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12. 2019

남향집

생각해보면 이 집에 와선 뭐든 잘 풀렸다.

“너네 집은 햇빛이 하얗게 들어오잖아.”

“그런가?”

내년 봄 이사를 앞둔 동네언니와 이런저런 얘기 중에 집 이야기가 나왔다. 한번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을 그렇게 기억을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거실 베란다를 확장해 한쪽 면이 전부 창문이다 보니 낮엔 뽀얗게 볕이 들어온다. 한겨울에 보일러를 안 틀어도 저녁 먹을 무렵까진 따스하다. 여름엔 맞바람도 제법 친다. 어릴 때부터 집은 정남향이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와서인지 고르고 골라 들어온 정남향 집이다. 첫 신혼집도 남향이긴 했는데 끝에 집이라 겨울이면 곰팡이로 속을 썩였다. 그래서 이 집에 이사를 올 때는 정남향에 낀 집을 고르겠다고 벼르다 왔던 기억이다.


동네언니는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너네 단지 좋다더라. 햇빛 잘 들어서 살기 좋대.”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동마다 간격 때문인지 희한하게도 정남향보다는 동남, 서남향 집이 꽤 있다. 인도와 수평으로 마주하지 않고 살짝 틀어 짓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 단지는 우직하리만치 인도와 수평으로 건물들이 놓여있다. 나는 혹여나 건너편 동에서 우리 집 안이 보일까 늘 걱정이건만, 이런 우직함이 누군가에게는 좋다고 느껴진다니 역시 남의 떡인가.

모카가 쉬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볕이 잘 들어오긴 한다.

마음에 드는 집이긴 해도 나는 서너 해 더 살다 종잣돈을 모아 집을 넓혀가고 싶었다. 남은 대출도 갚아야 한다. 요즘 시대에 현금 쌓아놓고 사는 집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동네언니의 그 말을 들으니 떠나려면 몇 년이나 남은 우리 집이 아쉬워진다. 햇빛이 하얗게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남향집.


생각해보면 이 집에 와선 뭐든 잘 풀렸다. 나는 꿈에 그리던 공모전 입상에 책도 냈고, 건강도 되찾았다. 남편은 한 번쯤 일해보고 싶었던 회사에 들어갔다. 한 번씩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정남향 집이라 해가 잘 들어서 잘 풀리나?’


우스꽝스럽고 미신에 가까운 생각이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볕이 잘 드니까 집이 따스하고 사람 마음이 녹진해지면서 둥글둥글 좋아진 게 아닐까? 그래서 술술 잘 풀려온 게 아닐는지.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그건 억지다. 어찌 정남향 집만 잘 풀릴까?


서향집은 붉은 노을빛이 오래도록 창가를 반짝이니 하루를 길게 사는 기분일 것이다.

동향집은 누구보다 아침을 개운하게 열 수 있어 종일 생기가 감돌 것이다.

흔치는 않지만 북향집도 창문만 잘 내면 쨍한 햇빛이 듬뿍 들어온다고 들었다.

어느 방향으로 살든 적당한 시절적절한 마음이 만나 술술 잘 풀리는 원인을 나는 괜스레 집 방향에서만 찾는다.

동네언니와 야채 장을 보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장본 것을 풀어 정리하는데 오늘따라 집이 대견스럽다. 칭찬하고 싶어 거실 모서리의 기둥을 쓰다듬어줬다.

애썼어. 나를 버티느라. 나의 모자란 모습이며 부실한 언행이며 다 감싸줘서 고마워. 집안에 햇빛 가득 부려놓고 따뜻하게 데워준 것도 고마워’


집이 수줍게 “우응-”하고 화답하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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