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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19. 2020

잔치국수의 화해

화해의 타래를 엮는다는 다짐으로 만든 잔치국수

연애 때부터 남편은 유독 한식을 싫어했다. 말로는 가리는 음식이 없다면서 메뉴를 고를 땐 언제나 이탈리아 요리나 중화요리 등을 좋아했다. 한식이라 했을 때 떠올릴 만한 국이나 탕, 하물며 고기 집조차 싫어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편도 아닌데 그랬다. 그랬던 남편과 결혼을 하고 함께 살다 보니 남편이 싫어했던 건 한식의 상징 뒤에 숨어있는 타인의 강요와 고집이었다.


어느 날이던가, 엄마가 보내준 김치가 무르익다 못해 칼칼하면서 알싸한 신맛을 냈을 때 별생각 없이 식탁에 올렸다. 남편은 한입 먹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보, 나 신 김치 너무 싫어. 이건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야.”


김치를 좋아하는 취향이야 제각각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납득했지만, 그럼에도 남편의 반응은 몹시 격했다. 궁금해할 틈도 없이 남편은 신 김치에 대한 지독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아빠가 어릴 때부터 신 김치가 몸에 좋다고 강요했단 말이야. 먹기 싫고 토할 것 같은데 신 김치 강요하고, 안 먹으면 한국 사람은 이런 걸 먹어야 한다고 혼내고 얼마나 피곤했는데. 신 김치 꼴도 보기 싫어.”


그 말을 들으니 아득한 남편의 옛집, 가본 적도 없는 그 4인 가족의 식탁이 상상되고 말았다. 고지식한 나의 시아버지가 김치 그릇을 앞에 두고 김치의 효능과 한국인의 민족성을 일장 연설하는 풍경. 곁에는 그 연설에 반쯤 동조하는 시어머니가 있었을 테고, 또 그 곁에는 남편과 함께 훈계 대상이었던 시동생도 앉아있었을 터였다. 그 짧은 상상에 밭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편의 설명에 따르면 시아버지는 밥상에 국이나 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100% 한식형 어른이며 신 김치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본인이 좋아하니 자식들에게도 먹어보라 강권하셨던 모양이다. 어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나 치킨이라도 주문하는 날이면 잘 먹는 아들들 앞에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늘 같은 말을 하셨다고 한다.

“에이, 맛대가리도 없다!”


‘맛대가리’라니. 맛에도 머리가 있었던가. 여기에 덧붙여 충격과 폭소의 ‘맛대가리’와 관련된 여러 경험담을 들었다.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남편이 한식으로 통칭되는 음식을 입에 대기도 전에 싫어했던 건 사실 그 음식으로부터 떠오르는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이미지, 강요와 비난으로 차려진 가족식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오로지 한식만 드신다는 남편의 말 때문에 처음 시부모님을 집에 초대할 때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모른다.

‘시아버지가 한식만 드신다니 반드시 한식을 차려야 할 것이고, 국물 요리도 입에 안 맞으면 안 될 텐데. 밑반찬은 나물과 조림이 모두 들어가야겠지. 식후에 커피 드리면 싫어하실까?’


그리고 시부모님의 초대상을 준비하는 머릿속엔 ‘맛대가리’도 둥둥 떠다녔다.

‘혹시 맛대가리 없게 차렸다고 하면 난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맛대가리, 맛대가리….’


맛대가리의 부담이 들락거리는 가운데 시부모님이 방문을 하셨다. 하지만 두 분은 내가 차린 음식을 자주 칭찬해주셨고, 담아드린 음식을 남김없이 드셨다. 식사하시는 내내 시아버지의 표정도 좋았다. 그리고 걱정했던 바와 달리 식후엔 커피도 드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차 종류를 여럿 말씀드렸는데도 커피를 고르셨다.

“아버지, 원래 커피 드세요?”

“응, 나 커피 좋아해.”


커피를 좋아하신다며 밝게 웃으시는 시아버지를 보니 맛대가리의 걱정은 사라졌고, 정석으로 차린 한식이 아니어도 거부감 없이 드시는 의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명절에 시가에 갔을 때도 오로지 한식으로만 차려진 상은 아니었다. 어느 명절에는 명절 음식과 함께 시어머니가 카레를 내놓으신 적도 있고, 밥상에 서구식으로 만든 샐러드가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시가의 식탁은 오히려 퓨전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버지의 ‘맛대가리’ 타령은 없었고 끝까지 식사를 잘 마치셨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는 동안 조금씩 알게 된 게 있다. 나의 남편인 아들은 고지식하고 수시로 훈계하려 드는 아버지에 질려버렸고, 아버지는 시대의 흐름을 좇는 아들이 못마땅해 자신이 생각하는 정석의 삶을 심어주려 고집을 피운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 부자 사이에서 신 김치는 괜한 미움을 받았고, 한식은 언제든 2인자였으며, 마주 앉아 먹는 밥상은 갈등의 복판이었다. 이들 사이에 ‘이해’란 도덕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피상적인 가치였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일 년에 몇 번 만날 때마다 훈계와 반박만 되풀이하다 따뜻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런 채로 지내던 차에 해가 바뀌고 겨울옷을 정리하고 새봄이 오고야 말았다. 설 명절 이후 뵙지 못했던 시부모님과 어버이날 무렵 식사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에 나는 오랜만에 두 분을 집에 초대하자고 의견을 냈다. 남편은 요리 준비하는 게 힘들까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은근한 핀잔을 덧붙였다.

“그럼 또 한식 차려야겠네? 아빠는 한식 아니면 맛대가리가 없잖아.”


그 우스갯소리에 피식, 웃으며 나는 서재에서 요리책들을 꺼내와 시부모님의 초대상 메뉴를 짜기 시작했다. 식탁 가운데 놓을 고기 요리와 간단한 전, 밑반찬을 정한 다음 국과 밥을 놓는 대신 잔치국수를 놓기로 했다. 이날의 식탁에서 주인공은 고기 요리도 전도 아니라 바로 이 잔치국수다.

예로부터 마을 잔치의 대표 음식이자 손님 접대용 음식이었던 잔치국수. 특히 결혼식 날에는 부부가 백년해로 살라는 복된 의미를 담아 잔치국수를 먹곤 했다. 결혼식과는 다른 초대 자리이고, 또 떠들썩하게 잔칫상을 차리는 날도 아니지만 내내 따스하고 온기가 지속되는 국수처럼 부자간의 고집을 이제 그만 내려놨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메뉴였다.


이윽고 두 분이 방문하기로 한 날, 오전부터 조금씩 음식을 장만했다. 우묵한 냄비에 굵은 멸치와 다시마, 디포리, 대파와 무를 듬뿍 넣고 팔팔 끓여 육수를 만들었다. 옆에는 프라이팬에 불을 올리고 지단을 부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색이 다르지만 곁에 있으면 어울리는 흰색과 노란색의 빛깔이 온전히 담기길 바라며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나눴다. 그것으로 두 장의 지단을 부쳐 한 김 식힌 다음 잘게 썰었다. 고소함을 더해줄 김도 잘게 썰어 담아 놨다.


시부모님이 집에 도착해 한숨 돌릴 무렵 면을 삶기 시작했다. 끓는 물에 소면을 넣고 휘휘 젓다 보니 부옇게 면수가 끓어오르고 말간 안개가 냄비 위에 이불처럼 포근하니 덮였다. 면의 겉이 살짝 투명해지자 건져내 세차게 헹궜다. 뽀얗게 삶은 소면을 둥글게 말아 면기에 담았다. 여기에 팔팔 끓여둔 육수를 붓고 가느다란 지단과 김가루를 얹어 식탁에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시부모님은 내 요리를 칭찬하셨고, 시아버지의 ‘맛대가리’도 등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식사를 하며 안도감을 느꼈고, 한 그릇 국수에 담긴 평화가 모쪼록 오래 지속되길 속으로 기원했다.

‘우리 가족 식탁에 분쟁도 설전도 없이 늘 오늘만 같았으면.’


은은한 육수가 만들어낸 따스하고 말끔한 맛처럼 시아버지가 보다 너그럽고 유연하게 남편을 대했으면 했다. 국수의 면발과 육수에 고루 섞여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내는 지단처럼 남편 역시 시아버지의 고집을 한 번씩 못 본 척해주며 감칠맛을 내길 바랐다. 이날 화해의 타래를 엮는다는 다짐으로 만든 잔치국수가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의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남아 오래도록 온기를 발산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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