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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n 03. 2020

아홉 살 가家생

주인님, 저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얼마 전부터 숨 쉴 때 가르릉 가르릉 소리가 났다. 기관지나 폐 어딘가에 먼지가 그득히 앉은 마냥 가르릉댔다. 그러더니 들썩일 때마다 시커먼 먼지가 털털 떨어지는 모습까지 목격되는 바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모습을 어찌 나만 알고 숨길 수 있을까? 언제나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여주인이 대번에 발견했다.

“아니, 방충망이 완전 새카맣잖아!”


주인들처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내 기관지 역할을 해주는 방충망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야 겨우 헹궈낼 수 있는 정도다. 나도 방충망이 늘 깨끗하면 좋겠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새카맣다고 놀라 큰 소리를 내는 여주인에게 괜히 서운하고 그랬다.


방충망의 때를 살피던 여주인은 급기야 내 얼굴에 난 뾰루지까지 발견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한숨까지 폭폭 쉬었다.

“창문이 너무 더럽네. 고층이라 구석구석 닦을 수도 없고.”


또 한 번 서운해지고 말았다. 내가 태어난 지 올해로 9년째, 주인들이 이사 온 지는 4년째. 그동안 창문 겉면을 제대로 닦은 적이 없으니 탁하고 더러운 건 당연했다. 주변 도로에서 날아오는 먼지와 식물들이 뿜어대는 온갖 가루와 생활 먼지가 내 얼굴에 달라붙어 굳어가며 뾰루지가 되는 걸 어찌하겠는가. 고층 아파트에 전문 인력이 오지 않는 한 창문이 언제나 반짝일 수는 없다. 근처 친구들을 둘러봐도 창문이 깨끗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날 여주인은 뭔가에 골몰해지더니 퇴근하고 돌아온 남주인과 심각하게 상의했다. 아, 설마 날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기관지에 때 껴서 좀 콜록댔다고, 뾰루지 좀 났다고 날 두고 어디론가 가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이날 주인들이 상의한 것은 날 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나를 깨끗이 단장하기 위한 장비를 마련하는 거였다. 며칠 뒤 주인들 팔뚝만 한 하얀색 창문 청소기가 도착했다. 안전장비를 연결하고 청소기를 내 얼굴에 부착했다.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내 얼굴을 닦았다. 이게 몇 년 만의 세수인가! 여주인도 흡족하게 바라봤다.

“아, 속 시원해!”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밑에 층 친구가 한 소리 했다.

“너희 주인들 또 뭐 샀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세수를 하는 나를 꽤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내친김에 주인들은 성마른 기침을 유발하던 방충망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주인은 또 무언가를 발견하고 남주인을 긴급히 불렀다.

“여보, 여기 방충망 빠졌어!”


사실 내 몸에 부착된 모든 방충망들은 조금씩 낡고 군데군데 떨어지고 있었지만 주인들이 알아채지 못하던 상태였다. 주인들은 방마다 다니며 방충망을 점검했다. 다시금 위기감이 찾아왔다. 아, 방충망 다 낡았다고 내게 애정이 식으면 어쩌지? 날 두고 다른 곳에서 여름을 보낸다거나 그럼 어쩌지?

모카 얘 일광욕하는 것 좀 보세요. 제 안에서 사는 존재 중에 제일 상전이라니까요.

이날 저녁 또다시 주인들은 심각하게 무언가를 상의했다. 이건 정말 위기였다. 4년쯤 살았으니 내게 애정이 식고 연식에 따라 달라지는 내 모습에 권태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본래 집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갓 지었을 때의 신선하고 풋내 나는 모습에 반해 들어왔다가 시간이 갈수록 고장 나고 낡고 변해가는 모습에 불만이 생기기 마련인 게 바로 집이다.


게다가 올 초에는 변기도 하나 바꿨고, 썩어가던 욕실 문도 교체하지 않았던가. 그때마다 여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했던 말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집이 10년 가까이 돼가니까 고장 나는 것도 많고. 돈도 많이 들어서 짜증 나!”


주인들도 나이 먹으면서 몸에 고장 나고 돈 많이 드는 건 똑같지 않으냐고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시간은 세상사에 똑같은 변화를 주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주인들이 여기 왔을 땐 내가 다섯 살이었지만 지금은 아홉 살이나 먹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조금 울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다해가는 방충망을 주인들이 발견한 게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버리는 게 아닐까, 하루하루 조바심을 냈다. 여주인은 한 번씩 생각날 때 방충망을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한숨을 쉬곤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낯선 두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풍채가 좋은 그들은 날카로운 수술 장비들을 들고 찾아왔다. 여주인은 그들에게 꾸벅하고 부탁의 말을 했다.

“꼼꼼하게 잘 부탁드려요.”


두 남자는 내 몸에 부착된 방충망을 모조리 뜯어냈다. 그리고 아주 촘촘하고 깨끗한 새 방충망을 설치하고, 귀퉁이가 부서진 세탁실의 창틀도 새로 교체했다. 아, 나를 외면한 줄 알았는데 주인들은 오래된 내 몸을 고쳐주려 했구나!

전염병 때문에 외출이 줄면서 여주인은 허구헌날 이런 걸 만듭니다ㅎㅎ

방충망 수술이 끝난 뒤 남자들은 돌아갔다. 여주인은 방마다 돌아다니며 깨끗해진 방충망을 감상했고, 남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방충망 다 됐어. 아주 깨끗해졌어.”


그리고 내가 기다렸던 말도 덧붙였다.

“이곳저곳 다 고치고 깨끗해졌으니까 우리 여기서 더 오래 살자!”


여주인의 입에서 오래 살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몹시 기뻐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기립하면 큰일 나니까 빙그레 웃으며 여주인을 눈길로만 따라다녔다. 기쁜 나머지 저 멀리 태양에 전보를 부쳐 나한테 햇살 좀 잔뜩 보내라고도 하고, 계절이 계절인 지라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를 내치는 데도 한나절을 보냈다.


“주인님, 저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사람 말을 한 번 해도 좋으련만. 실로 불가능하기에 나름의 방법으로 주인들을 보호하고 내 몸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도 아홉 살 가家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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