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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14. 2020

여름의 침묵

하루빨리 가을볕에 이불을 말리고 싶다.

이틀을 내리 아팠다. 집에서는 냉방을 하지만 간간히 강아지 산책을 시키거나 동네에 나갈 때, 외부 일정이 있어 전철역으로 향할 때 잠깐씩 폭염에게 몸을 드러낸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베개가 불편했거나 이쯤이면 아플 때가 됐거나,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고통을 꼬박 이틀 동안 치렀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니 절반쯤 회복세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렇게 누워만 지낼 수 없다며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남편과 나누어 먹고 채비를 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 반납이 임박한 책 때문에 도서관에 들렀고, 오는 길에 반찬가게에 들르고, 약국에 들러 필요한 몇 가지 약을 구입해 불룩한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느 여름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여름은 항상 시끌벅적하고 세상에 7가지 무지개색만 존재하듯 요란한 계절 아니었던가? 동네에서 몇 걸음씩 떨어져 있는 장소들을 들른 게 고작이지만 내가 디딘 세상은 익숙한 여름의 색이 아니었다. 흐린 하늘이 주는 회색, 밀도 높은 습도가 만들어낸 묵직한 공기의 뿌연 색, 한가한 상점들의 맥 빠진 색, 이 더위를 피해 어디든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의 지친 색.


게다가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길에는 반바지 차림에 씽씽카를 끌고 나오는 아이들에게서 오렌지맛 탄산음료와 같은 주황색이나 민트색이 자주 보였고, 헥헥거리며 뛰노는 강아지는 흰색과 검은색과 베이지색이 뒤섞이고, 머리에 선캡을 쓰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휘감은 여인들은 무지개색 중 한 가지 색을 꼭 얹고 있었는데 무채색 여름의 거리라니. 어쩐지 오늘 오전의 거리는 침묵을 지키는 것만 같았다.


전염병은 이토록 계절이 기록하는 색깔마저 뺏어버렸구나. 오랜 폭우가 끝나고 찾아온 묵직한 더위에 다들 말이 없어졌구나. 나 역시 잠시 걷는 그 길에서 뒷목이 흥건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 산이 보였다. 이사 올 무렵에는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산의 중턱을 깎아 건물을 올리고 있다. 이런 말 뭐하지만 '남의 생살 깎아서 집 지으면 잘 될 것 같니'라고 핀잔 한 마디 하고 싶었다. 자꾸 그렇게 남의 살 깎아대니까 산사태가 나도 할 말이 없고, 땅 밑을 그렇게 뚫어대니까 지반이 약해지고 역류해도 뭐라 따질 수도 없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이렇게 혼잣말로 핀잔을 줄 때 맞장구쳐줄 여름도 전염병 덕에 시들해져 침묵만 지킨다. 회색의 여름, 침묵하는 여름. 이 풍경이 몹시 낯설어 나 역시 집으로 얼른 숨어들고야 만다. 하루빨리 가을볕에 이불을 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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