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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18. 2020

보일러 앞 짧은 단상

이렇게 황급히 겨울을 맞을 순 없다.

가을 맛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겨울 냄새를 풍기는 건 반칙이라 생각한다. 와, 게다가 치사스럽게도 단풍 물은 절반도 들이지 않았건만. 뭐가 그리 급하고 바쁜지 세상은 옷을 좀 더 추이라고 등을 떠민다. 


집에서 긴팔을 입고 있었지만 이대로면 밤에 춥지 않을까 싶어 보일러 제어기 앞에 섰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나는 해지기 전 보일러를 높이고, 아침에는 낮추기를 몇 년간 해왔다. 그런데 이 낯선 감정은 뭐람. 몇 년간 해온 일이 몹시 아득한 시절의 습관처럼 어색했다. 작년 겨울 아니 올해 초봄까지 해오던 일이 너무나 옛일 같다. 


그때의 내가 이렇게 옛날 사람 같은 이유는 뭘까? 고작해야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작년 11월 가을!

짐작해보건대 감정이 수없이 융기하고 꺼져 들었던 일 년여를 보내서 아닐까? 해일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덮쳤는데 마치 각기 다른 마법이 벌어진 것처럼. 나에게는 가까운 과거의 일이 모두 아득한 옛일처럼 거리가 생성되는 마법 말이다. 해일 사이로 어느 구석에는 끓어오른 용암이 삐져나와 주상절리의 육각을 조각했을지도, 어딘가의 지면을 내리 깠을지도 모르겠다. 


보일러 제어기 화면 속 버튼을 톡톡 누른다. 일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지만 다른 사람. 두 가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답을 갈구하는 버튼을 톡톡 누른다. 이렇게 황급히 겨울을 맞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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