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얼마 전 지인이 SNS를 통해 자신을 ‘요즘 것’이라 칭한 짧은 글을 봤다. 자신은 명절에 얼굴만 쏙 비추고 시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편히 먹고 나오는 요즘 것, 요즘 며느리란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명절 해방을 위해 소갈비찜을 연습 중이란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착한 며느리, 가족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착한 여성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요즘 ‘사람’도 아니고 굳이 요즘 ‘것’이라며 자신을 낮춰야 하는지, 남성은 명절에 음식 안 하는 자신을 요즘 것이라 낮춰 말할 리가 없는데 왜 이 여성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춰 말하는지 탐탁지 않았다.
게다가 시어머니에 이어 며느리가 하는 게 고작 소갈비찜이라니. 명절 요리의 고단함을 덜고 싶었다면 맛있는 요리를 포장해 와도 되고, 재료를 사서 아들과 함께 만들면 될 것을 왜 연습까지 해야 하느냐 말이다. 명절엔 반드시 기름진 전통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그 역할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이어지는 여성의 담당이며, 이러한 구습을 스스로 알아채 실천하는 여성이야말로 착하고 예의 바른 며느리라는 메시지가 축약된 글이었다.
이 글은 지인을 포함한 우리에게 익숙해진 착한 며느리의 프레임이 작용한 예다. 살면서 은근한 눈치로 터득하게 되는 여성 생애의 프레임 말이다. 프레임이 전승되는 데 힘을 보태는 악역(?)이 더러 존재하긴 하지만, 프레임의 전승은 여성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혹은 정겨운 모습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조남주의 <우리가 쓴 것>은 이 같은 프레임에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냉철하게 대응하기보단 프레임의 자연스럽고 정겨운 면모를 깊이 들여다보며 써 내려간 이야기다. <82년생 김지영>의 따사로운 영향력이 여전한 작가지만, <우리가 쓴 것>은 다소 은은한 어투로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에는 초등학생부터 80세 여성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이 겪는 경험을 보여준다. 그 경험은 우리가 이미 거쳐 온 삶과 닮은꼴이 아주 많아서 읽을수록 ‘아, 그랬었지.’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탄과 재미 속에서 한 번씩 ‘헉’하고 허를 찔린다. 그 순간은 그러려니 하며 넘겼던 프레임, 익숙해진 나머지 인식조차 못 했던 여성의 약자 구도가 슬며시 음영을 드러낼 때이다.
놀랐다. 엄마의 목소리가 커서도 아니고 화를 내서도 아니었다. 발음이 너무 좋았다. 식탁에 둘러앉아, 과일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시며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아버지가 의견을 내고 엄마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오빠들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의 이사, 누군가의 진학이나 취업 같은 중요한 결정도, 여행지, 외식 메뉴, 텔레비전 채널 같은 사소한 결정도 결국은 아버지 뜻대로 되었고 엄마는 늘 중얼거리는 사람이었다. 엄마도 저렇게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할 수 있구나. -95P
의견을 내고, 결정에 주도권이 있는 여성은 ‘대장부’라 칭하지만, 남성에게는 ‘사내답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오랜 인식 속에는 앞장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주도하는 게 사내다운 일이며, 여성은 그 의견을 보조하는 나긋나긋하게 동조자인 것이다. ‘조신하다’라는 말로 비실용적인 명예를 만들어주면서 말이다.
글 속에서 표현하듯 중얼거리는 엄마, 할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숱하게 봐왔던가. 암탉 운운하는 이들이 다소 줄었기는 하나 여전히 집안에는 가장이 존재하고, 가장의 목소리는 강력한 법칙이 된다. 간혹 가장의 역할을 하는 여성에겐 대장부라는 별 도움되지 않는 별명을 붙인다. 대장부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 대장부는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를 뜻한다. 주장이 강한 여성에게 남성을 빗댄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프레임이 은은하고 푸근한 나머지 그 프레임을 부식시키는 이들의 노력이 거칠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여성이 오히려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자발적으로 구습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일 땐 프레임을 한구석을 두드리는 이들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 258P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한 번씩 점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구습에 동참한 건 아닌지, 무심코 넘겨버린 그 일이 정겨움에 취해 불평등을 은폐한 게 아닌지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며 ‘여성다움’과 ‘며느리다움’의 프레임을 퉁퉁, 두드려본다. 이젠 부서질 때도 되지 않았냐면서 말이다.
+ 안녕하세요. 도란 작가입니다.
1년 가까이 우먼타임스에 페미니즘 칼럼을 연재했는데요. 이번 10월부터는 새롭게 페미니즘 독서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매체에 공개된 글을 브런치 독자분들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듯 해 제 계정에도 조금씩 옮겨두기로 합니다.
[우먼타임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