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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30. 2017

추억도 자양분도 아닌 '따돌림'

딱 하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딱 하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면 하루 정도면 대수롭지 않은 경험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따돌림 경험을 말해주며 위로하기도 하고, 따돌림 한 번쯤은 당해봐야 사회생활 잘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하루로 인해 내가 사회생활을, 그러니까 인간관계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외로웠던 하루, 그 최악의 하루를 적어보려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한 동네에 살던 D라는 친구가 있었다. 부모님이 세탁소를 하는 D네 집은 세탁소 뒤에 붙은 단칸방이었다. D는 형제가 많았다. 언니들과 남동생까지 모두 다섯 남매였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단칸방에서 부모님과 형제들까지 일곱 명이 살았다는 건 그리 넉넉지 못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D는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을 좋아했다. 한 동네지만 마당이 있었고, 부모님방 외에 형제들이 각각 방 하나씩 지니고 사는 우리 집을 동경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사는 곳이 좋다한들 집에 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걸으며 집에 늦게 가고 싶었는데, D는 하교길에 늘 나를 재촉해 우리집에서 한참 놀다 본인의 세탁소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D가 늘 피곤했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가장 피곤한 점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점이었다.

“H가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이번에 나랑 크리스마스 카드 교환하기로 했거든.”




어릴 적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많이 받는 게 훈장과 같았다. 받은 카드의 수만큼 교우관계가 좋고 인기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서로 약간의 간을 보는 것이었다. “난 너에게 카드를 주고 싶은데, 넌?” 이런 식으로 서로 의사를 묻고 교환이 성립된 사람 수에 맞게 카드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그게 참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겨울방학 무렵이면 그저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에게 카드를 주고 상대가 주지 않더라도 무심하게 넘어가곤 했다. 교환을 약속한 카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연탄재를 뿌리는 기분이랄까.


D가 말한 H라는 친구는 나와 유치원 때부터 친하게 지낸 남자아이였다. H가 D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D가 H를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D의 말에 고개만 끄덕여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힐난의 화살이 다가왔다.


“야, 넌 왜 대답을 안 해? 너 생각엔 H가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난 잘 모르겠는데? 어떤 점 때문에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본 게 없어서.”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D는 벌떡 일어났다.

“그걸 꼭 봐야 알아? 넌 왜 그렇게 너밖에 몰라?”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D는 신발을 구겨신고 본인의 세탁소로 가버렸다. 왜 나밖에 모르는 건지 영문은 몰랐지만 D가 가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종일 하는 이야기가 자신이 예뻐서 아역 탤런트를 해도 된다느니, 자기는 피부가 좋아서 화장을 안 해도 된다느니, 자신이 은근 노래를 잘한다느니 등의 내용 뿐이라 들어주기도 진이 빠지던 찰나였다.


다음날, D는 아무렇지 않게 하교길에 우리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오늘도 D의 자랑을 들어야 한다면 집에 안 가고 말리다.

“나 오늘은 다른 친구랑 가기로 했는데?”

“다른 친구 누구?”

“아, 너 모르는 애야.”

“알겠어. 그럼 내일 봐!”


D는 먼저 교실을 나갔다.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친구와 그날 동네까지 함께 걸어간 후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이때까진 다음날 내게 일어날 일을 전혀 예감하지 못 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면서 나를 바라보는 동공들은 차게 얼어있었다. 그것은 말로 하지 않아도, 글로 쓰지 않아도 피부로 알아채는 ‘육감’이었다. 무언가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옆에 짝에게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앞뒤에 앉은 친구들에게 말을 걸면 외면했다. 아침부터 철저한 따돌림이 시작됐다. 오전수업은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점심시간엔 참기 어려웠다. 모두 나와 점심을 함께 먹지 않으려고 했다. 함께 밥을 먹던 친구들은

“미안. 오늘은 따로 먹자.”라며 나를 피했다.


교실 안 모두가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고, 남자아이들은 “쟤, 밥 혼자 먹는다”며 키득거렸다. 도시락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밥을 남기면 엄마에게 혼나는데. 이생각만 하며 겨우 한 그릇을 비웠다.


오후 수업이 끝날 무렵 내 자리로 쪽지가 왔다. 별관 지하에 있는 예절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궁금해서 가본 예절실 앞에는 신기하게도 우리 반 모든 여학생들이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D는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무장하고 서있었다.


“너 어제 우리반 애랑 집에 가면서 왜 내가 모르는 애라고 거짓말 했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너가 날 무시하니까 말 안 한거잖아! 너가 뭔데 나를 따돌리고 다른 애랑 집에 가?”

D의 말 속엔 자신의 하교길에 나의 동행이 너무나 당연한 부속품이었다. D는 계속 쏘아대기 시작했다.


“내가 싫어서 그런거잖아! 참내,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날 따돌리고 다른 애랑 집에 가냐고!”

따돌리는 건 지금 네가 내게 하고 있는 이 행위인데.’

나는 말없이 숨을 삼켰다. D는 모여있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네 얘한테 불만 있는 거 다 말해.”


설마 이런 허접한 명령에 아이들이 불만을 말할 줄은 몰랐다. 믿기 어려웠지만 평소에 인지하지 못 했던 사람에 대해 불만을 어떻게든 끄집어 내야 하는 ‘자발적 동의’에 단 한 명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 한 마디씩 나를 향한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재수 없어.”

“난 별 생각 없는데.”

“그냥 싫어.”

“동감.”


이런 식의 의미 없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아이들이 내게 진심으로 불만을 갖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위선의 대답일지언정 상처는 피할 수 없었다.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이 의미 없는 불만표현을 마친 후, D와 함께 예절실에서 나갔다. 결론이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나는 울음도 나지 않았다. 등에 더운 땀줄기가 흘렀다. 커다란 이벤트를 치른 기분이었다. 이벤트의 내용은 따뜻하지 않았고, 가슴에 굵직한 흉터가 남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신기하게도 내게 무모한 불만을 표시하던 친구들이 한 명씩 다가와 사과를 시작했다.

“어제 미안했어.”

D가 시켜서 그랬어.”

“나 사실 너 안 싫어해.”

그들의 변명을 그저 웃으며 받아냈다. 전날의 수모와 외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과를 받은 날, 더러워진 기분에 어쩔 줄 몰라 집에 가는 길에 가래침을 뱉었다.


얼마 후 겨울방학을 맞았고, 긴 방학의 끝에 졸업을 했다. 그후로는 따돌림을 당한 적은 없다. 위기의 순간이면 가슴에 박힌 흉터가 무기로 바뀌어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친구를 애써 무시하며 갈등을 피하는 무기였다. 그렇게 나는 싫은 자리는 피하고, 싫은 친구는 말없이 속으로 깔보며 성인으로 성장했다.


20대 중반쯤, 초등학교 반창회가 있었다. 초등학교의 마무리가 좋지 않아 참석하지 않으려 했는데 친한 친구가 함께 가자고 했다. 내키지 않지만 친구가 어색할까 싶어 함께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D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너 정말 오랜만이다! 길에서 보면 못알아보겠다, 완전~”

절실히 기다린 재회를 하는 사람처럼 D는 한껏 들떠 나를 맞이했다.


“너 기자됐다는 소식 들었어. 나는 여기 인천에 있는 케이블방송에서 PD하는데 하, 정말 일 많고 힘들다. 너네 회사는 어때? 급여는 괜찮아? 너네 회사에 내가 갈만한 자리 없을까?”

갈등을 피하는 무기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주인을 만났다는 신호일까. 아무 대답을 안 하자 D는 어릴 적 표정으로 돌아왔다.


“야, 싫으면 싫다고 말해. 왜 말을 씹냐?”

“너 나 따돌린 건 기억나니?”

“뭐?”

“너 나 따돌렸잖아. 반 애들하고 모조리 모여서. 이제 와서 얘기하는 나도 쩨쩨하지만 그런 짓을 해놓고서 나한테 일자리 알아봐달라고 하는 너도 정말 없어 보인다.”


D의 눈동자는 이글거렸다. 함께 간 친구가 분위기를 중재한다며 나를 데리고 나왔다. 갈등을 피하는 무기가 가슴 속에서 요동을 쳤다. 이날을 기다린 것 마냥

‘잘했어. 잘했어! 이제라도 잘 한거야!’라고 외쳤다.


하루의 따돌림, 딱 24시간. 정확히는 등교시간부터 하교시간까지 8시간의 소외. 그 경험은 나이를 한참 먹고 떠올려도 무섭고 따가운 기억이다. 이런 경험이 아무렇지 않고, 사회생활에 밑거름이 되는 것이라면 사회생활 따위는 안 해도 괜찮겠다.


삶에서 가장 지독한 소외를 열세 살에 겪었다. 그날의 예절실에서 눈물 대신 땀을 흘리던 나는 성장을 마치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제라도 할 말을 다해서 괜찮은 걸까? 시원하게 속내를 말했으니 이제 마음이 편해질까?

그럼에도 종종 예절실 앞에서의 시간과 차가운 동공들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내 삶을 통틀어 가장 아프고 외로웠던 날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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