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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10. 2021

제가 여자라서 밥을 차린 게 아니에요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제가 여자라서 밥을 차린 게 아니에요


어떤 주장을 할 때 앞에 사족이 붙는 것을 질색한다. 사람이 어찌 본론만 말하며 살 수 있겠냐마는, 사족이 메시지를 흐리는 것을 좀체 참을 수 없는 꼬장꼬장한 성격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사족 중에도 이러한 종류를 특히 좋아하지 않는다.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요즘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남자들 마음도 이해해요. 그렇지만….”     


자신 안의 여성주의를 한번 포장한 다음에 나오는 메시지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할 말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사족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굳이 ‘용기’라는 단어를 붙여야 한다면 페미니즘은 용기의 집합체인 걸까.      


최근 읽은 정희진 작가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여성의 언어’를 지닌 페미니즘을 설명한다. 남성 중심의 언어로 세워진 세계에서 여성의 언어로 말할 때 페미니즘 앞에 붙는 사족은 조금 우스워진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에게는 언제나 권리보다 도리(의무)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여성들은 항상 자기주장을 할 때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접두어를 붙인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 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 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 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 47p.     


그러니까 여성 1호가 가족들 아침밥 챙겨주는 이야기 뒤에 자신의 직업적 성과를 보여줄 때 그 모습은 ‘어머니 성공신화’가 된다. 직업적 성과만으로도 훌륭하겠지만, 가족의 밥을 꼬박꼬박 차려주면서 일도 잘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이 세계가 인정하는 여성 1호다.      


중요한 메시지는 직업적 성과와 사회적 영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침밥이라는 사족이 붙어 능력 있는 여성을 어머니라는 틀에 한정한다. 그럴 때는 부러 앞에 붙는 사족을 가린 채 문장을 다시 읽어보거나, 사족이 나오는 영상을 건너뛰고 메시지만 시청해본다. 사족 없이 말하는 성과, 명예만으로도 여성은 충분히 빛난다.      


남성 관점의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족들 아침밥 챙기는 여성은 숭고하고 위대한 어머니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밥하는 어머니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여성이 인정받을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포장하면서 남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쓸 필요 역시 없다.      


그 기준이 어렵다면 반대로 대입해보면 된다. 아침밥 챙겨주지 않는 아버지를 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자신을 성평등주의자가 아니라고 사족을 달아 소개하는 남성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말이다. 이처럼 우리 세계의 언어는 남성 중심으로 확립돼 있다.      

‘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나는 명예나 성과가 소소한 작가인데도 밥과 관련된 사족이 붙을 때가 많다. 가사분담을 하면서 요리실력이 낮은 남편은 청소를 맡고, 주방일은 내가 맡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밥하는 나를 부지런하다고 평가했다.      

“남편 아침도 챙기고 정말 대단하세요.”

“바깥일 하면서 직접 남편 식사 다 챙기고 정말 부지런한 것 같아요.”     


그런 칭찬을 들으면 부지런을 인정받은 듯해 기분이 좋으면서도, 맞벌이하면서 남편 밥까지 잘 챙기는 아내의 사족을 얻은 것 같아 골몰해지곤 한다. 분담한 가사를 처리할 뿐이고 외식보다 집밥을 좋아하는 내 입맛 때문에 요리하는 것뿐인데 일을 하면서 살림까지 잘하는 만능 주부로 오해받는 기분이다.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 77p.     

나의 바람은 사족 없이 부지런하고 멋진 작가로 칭찬받는 것이다. 아침밥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대단한 사람, 남편 밥을 챙기지 않아도 내 일과 작품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야말로 ‘그냥’ 대단한 작가이자 여성일 수는 없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밥을 차린 게 아니다.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 차린 밥상이 나를 수식하기를 원치 않는다. 사족 없는 인생, 사족 없는 작가로 살고 싶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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