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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24. 2021

한국에는 ‘길리아드’의 싹이 남아 있다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한국에는 ‘길리아드’의 싹이 남아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


젠더를 구분하는 주요 기준은 어찌 됐든 생식(生殖)이다. 아무리 평등을 추구해도 태어난 몸을 개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 성이 만나 자신들과 닮은 개체를 만들어 종족을 유지할 때 남성이 하는 역할과 여성이 하는 역할이 다르다.


그리고 이 역할의 무게가 도무지 격차를 줄이기 어려운 탓에 여성은 ‘낳는’ 행위와 그로 인한 변화를 모두 감당하게 된다. 과거 여성은 잉태하고, 낳는 과정을 감당하면서 종족 번식을 위한 도구로서의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낯뜨거운 역사 어디에선가 씨받이가 존재했고, 남아선호사상이 강력했던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기약 없는 임신을 해야 했다. 자궁이 있다는 이유로, 출산이 가능하다는 숙명으로 인해 여성은 행복하면서 불행했다. 


그러한 과거가 나를 비롯한 현대 여성의 등 뒤로 사라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아들 타령하는 어른은 크게 줄었고, 씨받이 같은 불법 대리모는 종적을 감췄다. 간혹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가 여성을 자궁으로 바라보는 발언이나 행동을 해 질타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부는 점차 사라질 것이며, 사라져야 옳다고 믿는다. 이처럼 우리는 출산과 비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이야기’ ⓒ 황금가지


그런 내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누가 상상할 수나 있을까? 아무리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해도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를 읽었을 때보다 훨씬 충격이었다. 소설 초반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여러 번 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녀 이야기> 속 세계관에서 여성은 오직 생식기관으로 존재한다. 환경오염과 각종 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미국에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길리아드’가 생겨난다. 길리아드에서 여성은 과거 임신중절, 동성연애를 한 이력이 있으면 이름과 가족을 뺏긴 뒤 ‘시녀’가 되어 임신 도구로 살아간다. 시녀는 잡일을 하고 사유재산이 없고 글을 읽고 쓰는 걸 금지 당한다. 명령과 규칙에 따르지 않는 여성은 고문당하며 도망이라도 치면 사형이다. 일정 나이까지 임신하지 않으면 ‘식민지’로 불리는 황무지로 추방당해 끔찍한 노역을 당한다. 


여성이 임신하기 위한 상대는 스스로 정하지 않으며 길리아드의 상위계급에 배정되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상위계급 남성과 그의 배우자, 시녀 셋이 한 침대에서 임신을 위한 의례를 치른다. 물론 이 과정에 정서적 교류나 스킨십은 없다. 


이제 불임의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오직 애를 낳을 수 있는 여자와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있을 뿐. 그게 법이다. - 108P


우리는 아기를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우리 육체의 안쪽일 뿐이다. 그들의 목적으로 보자면, 피부가 호두 껍데기처럼 쭈글쭈글하고 딱딱해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 - 171P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 다니는 성배다. - 238P


길리아드는 충격적이고 난해한 디스토피아다. 하지만 읽을수록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길리아드를 자꾸 발견하게 되는 건 왜일까?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 속 나는 이 책을 읽을수록 왜 길리아드가 익숙한 걸까?


우리나라는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위헌임을 판결했지만 이를 대체하는 입법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생명의 존엄함은 인정했지만,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장성한 자녀와 그 배우자에게 서둘러 임신할 것을 강요하는 어른이 남아 있다. 아내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여성의 의무인 듯 강요하는 남편도 없지 않다. 여자는 골반이 커야 한다는 둥, 아이 쑥쑥 잘 낳게 생겼다며 칭찬인 듯 성희롱하는 노인도 존재한다. 이 같은 대한민국은 길리아드와 진정 닮은 꼴이 없을까? 그들에게 여성과 자궁은 동의어 혹은 비슷한 단어가 아닐까?


불쾌하고 답답한 <시녀 이야기> 속 길리아드는 경미한 수준으로 우리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 소설이 무려 30여 년 전 발표됐다는 사실에 통탄을 참을 수 없다. ‘한국판 길리아드’가 남아 있는 세계에서 시녀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일 혹은 할 말이 무엇인지 숨을 고르는 오늘이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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