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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08. 2021

아담한 꿈에 지친 여성에게

밝은 밤, 최은영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아담한 꿈에 지친 여성에게

최은영 작가 소설 ‘밝은 밤’


학기 초면 으레 장래희망을 묻는 시간이 있었다. 종이에 적어 내거나 한 명씩 일어서서 자신의 장래희망을 말했다. 장래희망으로 대통령, 과학자 등을 말하면 주변에서 환호했다. 어른이 알려준 듯 은행원, 교사 등 무난한 직업을 말하고 빨리 발표를 마치는 학생도 많았다. 나는 후자였다. 늘 교사라고 말했다. 사실 교사가 어떤 직업인지 알고 말한 적은 별로 없었다. 엄마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늘 똑같은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누가 장래희망 물어보면 교사라고 해. 여자 직업으로 교사가 최고다.”


그래서 한동안 교사라고 답을 했지만 “너는 사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구나.”라는 답이 돌아오면 그건 또 아니라서 늘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자란 후에는 엄마가 알려주는 장래희망이 추가됐는데 바로 ‘경리’였다. 회사마다 금전의 출납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필요하고, 일이 고되지 않을 테니 여자 직업으로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경리 혹은 교사. 엄마가 내게 원하는 장래희망은 그 나이대 엄마들이 딸에게 바라는 대중적인 직업이었다. 그리고 그 직업에는 엄마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 직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학교 발령은 주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게 받게 되고, 경리는 어느 회사에나 있으니 그 역시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딸은 곁에서 고만고만하고 안정적이면서 튀지 않는 일을 하길 바랐다면 집안의 아들은 달랐다. 아들은 꿈을 펼쳐야 한다고, 사내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썰라며 부추겼다. ‘Boys, be ambitious.’라며 소년에겐 야망을 품으라 말하지만, 소녀에게는 가족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주어진 그릇 안에서 행복을 찾으라 말했다.


최은영 작가 소설 ‘밝은 밤’ ⓒ 문학동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에서는 화자인 지연이 남편과 이혼 후 ‘희령’으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천문대 연구원으로 일하는 지연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할머니와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만나게 된다. 너무나 애틋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지연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까지 이어진 이야기를 듣는다. 옛이야기를 들으며 지연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퍼즐을 맞춰나간다. 


고조할머니 때부터 전해진 이야기라 하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낯선 사내와 결혼한 증조할머니 중심으로 시작된다. 선택지가 한 개 아니면 두 개 혹은 선택지가 아예 없는 여성의 삶. 그 삶이 힘겨울 땐 도피를 선택한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지연의 엄마까지 모두 남편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하지만, 그 삶은 도무지 행복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며 자신들이 선택한 도피처보다 속을 터놓고 지낸 또래 여성과 그들의 자녀와 어울려 지내는 데서 행복과 삶의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가족과 가까운 곳에서 주어진 그릇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미싱을 배워 옷을 만들고, 방앗간에 나가 곡식을 비질하고 떡을 빚는다. 인쇄소에 나가 잡일을 하고, 시장 모퉁이에서 과일을 판다. 


그중 다른 인물이 하나 있다면 지연의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새비 아주머니와 그의 딸 희자다. 남편에게 존중받고 서로 배려하며 살았던 영향인지 새비 아주머니는 딸이 고만고만하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335p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무한함, 한계를 측정할 수 없는 삶의 신비를 새비 아주머니는 딸에게 깨우쳐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 시절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소일거리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지만 딸에게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새비 아주머니의 바람대로 딸 희자는 평범한 결혼생활 대신 유명한 암호학자가 되어 독일에 살게 된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37p.


다들 시대가 변했다고 한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직업의 성차별을 덜 경험하게 되고,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자아이에게 아담한 꿈을 꾸라는 조언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나는 엄마가 원했던 경리와 교사의 길을 가지 않았고, 여전히 자유로운 장래희망을 꿈꾼다. 지금의 나와 어린 여자아이들이 꿈을 꾸는 현재는 소설 속 고조할머니부터 화자인 지연의 삶이 보여주는 무수한 여성의 삶이 모여 조금씩 자리를 고친 덕분 아닐까. 그 무수한 역사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Girls, be ambitious!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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