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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27. 2022

설명하기 힘든 때, 나는 조력자를 원했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국어선생님 최승범의 페미니즘 이야기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언젠가 함께 일하는 프리랜서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임산부 배려석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은 하필 내가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던 날이었다. 나는 임산부가 아니니 그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있던 군인에게 괜히 흠칫한 감정이 들긴 했다. 


이런 일이 어디 군인뿐일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노인, 어린 학생 등등 많은 이들이 임산부 배지를 보고도 모른척한다. 임산부가 어렵사리 양보를 부탁하면 껄끄러운 눈으로 쌩하니 일어나거나 간혹 임신한 게 대수냐는 식으로 핀잔주는 어르신도 있다. 


게다가 임산부가 아닌 내가 넉넉한 원피스를 입은 채 앞에 서 있기라도 하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누군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임신 중인지 아닌지 점검한다. 마치 ‘내가 앉은 자리를 빼앗기 위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임신했나, 안했나’ 매의 눈으로 검열하는 듯하다. 그저 여성이고, 편한 옷에 운동화를 신었을 뿐이고, 어쩌다 보니 문에서 가까운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다는 이유로 화살 같은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내가 이런데 실제 임산부는 오죽할까.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토로했을 때 한 남작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무조건 양보해야 돼요? 안 하면 안 돼요?”
“임산부가 타면 양보하는 게 좋겠죠? 임신 기간은 몸이 힘든 시기니까요.”
“그런데 배려석이니까 양보하든 안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잖아요.”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배려든 양보든 권장일 뿐이지 의무는 아니라 상대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수많은 임산부의 안전을 보장해주자는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제안하는 자리다. 남과 여의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임신을 담당하게 된 여성에게 앉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는 시민의식에 기대는 자리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상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옳았을까, 내가 말하는 실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누군가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설명을 도와줬더라면. 그 순간 나는 조력자가 필요했을 터다.

국어선생님 최승범의 페미니즘 이야기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 생각의 힘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의 저자 최승범 작가는 제목대로 남성이자 페미니스트이다. 작가는 교사라는 직분에 맞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페미니즘을 표현한다. 그는 페미니즘을 통해 성평등이 이루어지면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거라 기대한다. 그리고 내가 조력자로서 기대했던 남성 페미니스트의 일면도 언급한다. 


답답한 일이지만, 남자들은 남자 말을 잘 듣는다. 중년 남성들이 식당 남직원을 ‘사장님’으로, 여직원을 ‘아줌마’로 부르는 것처럼, 전화를 받은 여성에게 다짜고짜 책임자 바꾸라고 말하는 것처럼, 남자들은 은연중에 남자를 더 신뢰하고 남자가 하는 일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137p


가끔 난감하고 외로웠던 순간에 대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말문이 막히고, 혹여나 분위기가 나빠질까 눈치 보던 모든 순간으로부터의 위로를 작은 책에서 받은 것이다.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표현해도 결국 여성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다수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 


유치하게도 성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을 ‘여자니까 여자편 든다.’라며 하찮게 판단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그럴 때 남성 페미니스트는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남자는 은연중에 남자 말을 잘 듣는다. 아직도 남자의 세계에서 ‘아내 말을 잘 듣는’ 남자는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니 말이다. 


여성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많은 수의 마이너리티다. 이 문제를 딛지 않고서는 평등도, 평화도 없다. 먼 미래를 보고 긴 호흡으로 살자. 나에게 유리한 쪽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쪽에 서서. - 164p.


꼰대들이 아무리 여자들 살기 좋은 세상, 여성 상위 시대 등을 운운해도 나는 아직 마이너리티 소속이다. 월급이 백만 원인 사람에게 “네 월급이 천만 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한들 그 사람 통장에 입금되는 돈이 천만 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성평등을 이루고 싶다면 현실을 비현실적인 말로 덮는 대신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 곁에 남성 페미니스트의 조력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음이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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