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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27. 2022

성범죄는 여전히 일방적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성범죄는 여전히 일방적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얼마 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의 이름에는 가해자 이름 대신 사건이 벌어진 대학교의 이름이 붙었다. 아마 그 학교의 재학생들에게도 매우 끔찍한 일일 것이다. 소식을 알게 되고 기사를 여러 개 찾아 읽어봤다.      


예상대로 기사마다 2차 가해가 한창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놀랄 만큼 자극적으로, 기사만 봐도 범행 과정이 상상되도록 제목과 기사를 쓰며 다시 한번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혔다. 피해자의 옷차림 운운은 참으로 한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상은 이제 학교 이름만 검색해도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졌다. 지금 피해자의 가족들은 인간답게 살 수는 있을까. 남 일이지만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으로 애가 탔다.     


특정 학교에서 벌어진 이 성범죄는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성폭력을 거부한 여성에게 벌어진 참극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성범죄 발생이 도무지 줄어들 조짐이 없고, 여전히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다. 물론 남자들도 폭력을 겪는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이나 죽음으로 귀결되는 성폭력은 대개 여성이 피해자였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원제는 "Mansplain"이다. 이 책 이후로 이 단어가 많이 쓰였다. (창비)

이 사건이 한창 미디어를 장식할 무렵 나는 마침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있었다. 책 속의 내용을 빌리자면 여성도 심각하고 불쾌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성의 전쟁에서만큼은 양성 중 한쪽이 일방적이다.      


IMF의 여성 총재는 전임 남성 총재와 달리 호텔에서 직원을 성폭행하지 않고, 미국 군대의 고위 여성 장교들은 남성 장교들로부터 성폭행으로 고발된 일이 없다. 스튜번빌의 남성 풋볼 선수들과 달리 여성 운동선수들은 의식을 잃은 남자아이의 몸에 소변을 보지 않고, 그 남자아이를 겁탈한 뒤 그 사실을 SNS에 떠들지 않았다.      

국적을 막론하고 왜 항상 성범죄는 일방적인 쪽이 가해를 저지르는가. 만약 일방적인 성범죄라는 데 공감과 동요가 되지 않는다면 글자 하나를 지우고 다시 생각해보자.      


용어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성’을 지우고 ‘폭행’에만 집중해보라. 폭력에, 타인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행위에, 모든 인권 중에서도 기본인 신체보전권과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행위에. -75P


사람들은 폭력에 반대하고 당연히 타인을 때리는 등의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성폭력, 성폭행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재검열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폭력에는 당연히 반대하면서 왜 성폭력 앞에서는 주춤하는가? 하필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가 뚜렷한 성범죄 앞에서 말이다.      


그건 여전히 특정 젠더에게 더 많은 권력이 부여돼서라는 생각이 든다. 양성평등이 됐다는 둥, 여성 상위시대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늘었어도 여전히 여성은 성폭력 앞에서 더 큰 피해를 본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자기 몸을 지키려 해도 힘에 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떻게든 공권력에 기댄다 한들 초범이거나 의도가 분명치 않았다면 가해자의 처벌은 기대하지도 못한다.      

그의 이름은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가능성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예의 진부한 옛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바꿀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속에는 우리 모두가 등장하며, 그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지켜볼 뿐만 아니라 직접 써나가고 들려주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몇 주, 몇 달, 몇 년, 몇 십년에 걸쳐서. - 84P


나는 앞서 언급한 사건이 비단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지 않는다. 권력을 덜 가진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재앙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에서 권력을 덜 가진 존재가 누구인지 다 안다. 길을 걷다가, 화장실에 갔다가, 학교에 갔다가 벌어지는 수많은 성폭력은 권력범죄다. 그리고 이를 재검열하려 드는 주변인들로부터 2차 가해를 받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입지는 어디인가? 가해자의 입지인가, 2차 가해의 소속인가, 피해자의 입지인가. 아니면 그조차 판단하지 못하는가. 허망하고 서글픈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입지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마음 놓고 공부하고 교류하며 지내야 할 학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쳐야 했던 이의 삶이 사무치게 슬프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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