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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n 27. 2024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돼지를 정말 잡아먹는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듯이 나는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 엄격하게 모든 육류를 제한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채식주의자에게 어떤 의무와 이미지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채식이 좋다고 권장하는 것도 강요와 불편함의 일종이다. 다만 우리가 먹는 고기가 어떤 생명을 착취하고 얻게 되는지, 그 생명이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도는 알아둔다면 쉽게 버려지는 음식과 사치와 보여주기식 육식을 자제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까지는 저버릴 수 없다.     


이 책이 큰 상도 받았고 선정 도서이기도 해서 기대를 안고 독서를 시작했다. 솔직히 초반에는 ‘왜 이렇게 웃기려고 들지?’, ‘그래서 대안축산연구회는 왜 시작한 거지?’라는 생각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다 읽은 후에는 방목돼지를 키우는 어려움을 알리는 동시에 편리와 생명존중이 박탈된 공장식 축산을 비교할 수 있게 돕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정보를 접했기에 공장식 축산이 문제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동물복지가 최선 혹은 차선의 대책이란 점도 잘 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이 아니라면 당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는 환경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은 나빠, 하지만 비싼 건 싫어. 이건 모순이다.      

한편으로 평소 늘 고민했던 부분 ‘동물복지라면 정말 괜찮은 걸까’의 의문도 가시지 않는다. 저자는 “동물복지도 결국 사람 중심의 생색은 아닐까?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자기 위안 말이다.”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나도 늘 고민했던 게 아닐까.

동물복지 제품은 동물이 살아있는 동안 공장식 축산보다 더 자유롭고 깨끗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건 맞지만, 어쨌든 그 동물을 착취한다는 최종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동물복지 제품을 택하면서 ‘그래도 일반 제품보다는 좋은 선택’이라고 위안 삼았던 건 아닐까.

인간이 동물의 고기를 먹고 진화하고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을 수 있던 건 위대한 발견이지만, 포식자의 관점을 떠나 생명의 가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인간에게 윤리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번식 역시 마찬가지다. 방목돼지의 자연스러운 흘레를 저자가 목격하는데 공장식 축산에 흘레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자연스러운 교미, 감정, 사랑을 강제로 배제하는 데 인간성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돼지는 개만큼이나 인지능력이 뛰어나고 감정과 표현에 능란하다고 한다. 가축과 반려동물의 차이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외모와 크기에 좌우된다. 그러고 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기준 역시 인간성이 결여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채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육식의 실체를, 채식의 필요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냉정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준다. 읽으면서 정말 잡아먹나, 꼭 잡아먹어야 하나, 하고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잡아먹는다. 세 마리 모두. 돼지를 죽이는 과정을 설명할 땐 읽기가 다소 힘들었다. 동물권을 강조한 실험이 아닌 축산의 구조를 보여주는 실험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임 끝나고 먹는 점심식사를 한 번쯤 채식으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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