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행복, 김신지
여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해가 진 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늘게 여름냄새가 끼쳐올 때. 풋내와 닮은 여름 냄새가 반가우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더위를 타고 땀이 많아서 여름은 원망스러운 계절이다. 모카를 키우기 전까진 여름에 외출 자체를 안 해서 열흘에 한 번 나갈까 말까였으니 말이다.
이런 내가 여름을 맞아 <제철 행복>을 읽으며 여름 절기인 대서를 보냈다. 일 년 24절기를 소개하고 절기에 맞는 제철 행복비법을 소개하는 이 책은 아주 신변잡기적인 글이다. 오직 계절과 나만 있는 이야기, 절기에 따라 드는 생각과 행복을 북돋는 방법을 소개한다.
‘아, 내가 이래서 이 계절 좋아하지.’
한 해를 잘 보낸다는 건, 계절을 더 잘게 나누어둔 절기가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 네 번이 아니라 스물네 번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일이겠지. 이래서 지금이 좋아, 할 때의 지금이 계속 갱신되는 일. 제철 풍경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고 틈틈이 행복해지는 일 네 번째 절기 춘분을 지나며 올해 들어 네 번째로 생각했다. 아, 내가 이래서 이 계절 좋아하지.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던 대서는 큰 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날이며 휴식이 제철이라고 저자는 썼다. 순간 사지를 쭉 뻗어 바닥에 대자로 누워보았다. 휴식이 제철인 계절. 달리 더위를 쫓을 방법이 없어 휴식이라도 해야 온전하게 보낼 수 있는 시절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원망이 조금씩 수그러든다. 그 외의 계절은 또 어떠했던가. 나는 어떻게 24절기를 보내며 살아왔을까.
힘겨운 계절인 여름을 보내기 위해 나름 제철 식재료를 잘 챙겨 왔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깨끗이 씻은 복숭아를 깎아 먹고, 점심에는 하얀 분으로 싸인 감자를 쪄서 모카와 나눠먹었다. 저녁에는 루꼴라를 가득 넣어 차가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제철에 성장을 마친 과일과 채소를 접하며 계절을 한입씩 음미한다.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 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바깥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일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봄에는 뭘 하든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워 오래 걷고, 가을에는 바삭거리는 낙엽이 좋아 오래 걷는다. 그래도 하나 조심하는 게 있다면 경칩이다.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에는 푹 자고 일어나 잔뜩 허기진 뱀도 깨어난다. 그래서 경칩 무렵 모카와 산책을 할 때 산을 끼고 있는 공원으로는 산책을 가지 않는다.
입동 무렵에는 두꺼운 이불을 꺼내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그리고 겨울 절기의 기억 중 하나는 동지에 먹던 팥죽이 있다. 어릴 적 엄마는 커다란 솥에 팥죽을 끓였다. 어느 날 책에서 동지 팥죽은 귀신을 쫓기 위해 장독대나 옥상에 한 그릇 올려야 한다는 글을 보고 엄마에게 전했는데, 엄마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건 미신이라며 망설임 없이 커다란 냉면대접 가득 팥죽을 담아 식탁에 올렸다. 엄마의 팥죽은 달지 않았다. 소금을 넣어 먹던 그저 식사로서의 팥죽. 엄마는 미신은 필요 없다면서도 동지만 되면 어김없이 팥죽을 끓이던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24절기를 이해하고 느끼며 <제철 행복>을 마쳤다. 다 읽고 나니 모든 계절이 사랑스러워진다. 항상 곁을 지키는 계절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계절 없는 세상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의 모든 순간에도 계절이 있었으니까. 그 시기에 적절한 행복을 찾아 좀 더 움틀거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운 계절 여름을 보다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조금 더 움직이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꽉 찬 24절기를 보내야겠다.
역시 제철 행복은 나눌수록 즐거워진다. 무엇보다 이 계절 안에만 있는 작은 기쁨들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가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좋다. 봄날의 벚나무 아래에 선 사람들처럼, 여름의 해변에 흩어져 앉은 사람들처럼. 삶을 지탱해 주는 건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 속 소소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사소한 것들은 실은 그 무엇도 사소하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