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에이미와 이저벨,을 읽었습니다.

by 귀리밥

독서모임 지정도서였다.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라던데, 눈물짓는 신파로 끝나지 않길 바라며 천천히 열어 보았다.


이야기는 오로지 여자 중심으로 전개되는데(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젊은 엄마인 이저벨과 딸 에이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미국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여자들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릿한 통증은 가슴에 남아 있었다. 환희에 가까운 무엇이 아련하게 윙윙거리면서 그녀의 기억 언저리에 살아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응답을 받았으나 이제는 받을 수 없는 어떤 갈망이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량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많은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원하던 아기들을 낳았고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통증은 무엇인가? 그녀가 라이프세이버스 사탕을, 감자튀김과 햄버거와 초콜릿 케이크를, 뭐든 닥치는 대로 쑤셔 넣는 이 붉고 깊숙한 구멍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녀가 뚱뚱한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활달한 베브. 뚱뚱이 베브. 그녀는 뚱뚱한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 검붉은 통증은 돌아가는 청소기처럼, 끔찍한 구멍처럼 거기 있었다.


몹시 뚱뚱하고 무언가 계속 먹고 변비에 시달리는 베브의 이야기다.


그런 날이 있다. 자꾸 허기가 지고, 밥을 먹어도 덜 먹은 것 같고, 술을 마셔도 안 취할 것 같은 그런 날. 이만하면 잘 사는 것 같은데, 싶다가도 이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드는 날. 사는 내내 그런 날은 수시로 찾아온다. 그럴 때 느끼는 허기는 베브가 느끼는 갈망, 비만과 참 닮아있다.


베브는 이 소설에서 제일 멀쩡한 성격의 사람으로 보인다. 어떤 허기를 짊어졌다 해도 그것을 비만으로 해소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산다. 잔뜩 뒤틀린 이저벨과 에이미 모녀에게 베브는 좋은 친구였다. 열여섯에 온갖 황당한 일을 겪은 에이미에게도 이렇게 위로한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혼잣말은 하지 말고. 이따금 목욕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그러면 되는 거야. 힘든 일이 주어져도 잘 이겨내면 돼. 그러면 괜찮아. 원래 그런 거라 생각하고 힘든 일을 잘 이겨내면 아무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 테니까.”


사랑스러운 뚱뚱이다.


사실 베브는 조연이다. 이 책의 굵은 줄기를 보자면 이저벨과 에이미의 갈등,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이 중심인데 이 둘의 감정 모두를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피하고 싶은 내용이기도 했다.


무더위 속 죽어버린 제라늄 화분이나, 아끼는 그릇을 쓰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엄마의 모습, 딸의 디테일한 모습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거나, 따뜻하다가도 엄마를 무식하다고 얕잡아 보는 딸의 융숭한 속내라든가.


결혼 전 인천에서 엄마랑 사는 동안 내가 떠올랐다. 내가 특별히 사고를 치거나 못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엄마는 늘 못마땅한 소리로 나를 힘들게 했고, 나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다고 반항하듯 집에서 나오고 싶진 않았다. 나에겐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나던 그 친정집, 베란다가 딸려있던 내 방, 구름무늬가 가득한 핑크색 벽지는 내가 골랐지만 가구를 고르는 것만큼은 선택권이 없던 시절. 내가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은 분명 겉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 시절 함께 집에서 살던 엄마가 느끼던 감정을 이저벨의 입장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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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닮고, 공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의 존재다. 어떤 모녀는 서로 닮은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모녀는 벌레 쫓듯 싫은 티를 내기도 한다. 어느 가정에 입양됐던 스테이시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생모와 운명이 닮은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이저벨의 어머니도, 이저벨도 엄마의 삶을 닮는 것에 겁을 낸다.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어떤 주요한 사건과 몇 가지 자잘한 사건이 더운 여름에 벌어지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될 무렵 조용히 해결된다. 이저벨과 에이미도 조금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그 와중에 에이미의 취향마저 이저벨과 닮았다는 점이 한 번 더 언급되면서 닮기 싫어도 닮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틈이 없는 모녀의 숙명이 또 한 번 드러나는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신경 쓰이고, 외면하고 싶어도 불거지고 마는 검은 선. 흰 선도 붉은 선도 아닌 그 검은 선이 웬만한 가정에서의 엄마와 딸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다행히 책은 열린 결말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에게 기승전결이 확실한 상태로 끝난다. 처음 우려했던 것처럼 눈물 짜는 신파도 아니고, 다 읽고 난 후 대단한 감동이 밀려오는 바람에 사랑을 가득 담아 엄마에게 전화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책 하나로 인해 획기적으로 변할 정도의 모녀 관계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모녀 관계는 그토록 복잡하고 확고하게 얽혀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도 어떤 역경이 몰려와 그것을 견뎌낸 모녀가 여전히 어색하게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적당히 시원했고, 어떤 측면에서는 속이 짰다. 이 책은 엄마와 딸이 동시에 자라는 성장소설이었다. 나와 내 엄마도 계속 성장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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