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노마드의 향유 #29 _ 독서노트
20대 한창때, 나는 프로그래머를 꿈꾸며 컴퓨터 세계에 발을 들였다. 기사 자격증을 따고,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히며, 프로그래머로서 1년 반 정도 일했다. 그 시기 엔비디아는 막 성장세를 타고 있었고, 젠슨 황은 지금의 그를 만들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엔비디아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1999년, 엔비디아가 상장될 무렵에도 여전히 업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닷컴 버블이 절정에 달해 있었고 수많은 IT 인력들이 캐나다로 향하던 시기였다. 나 또한 그 흐름 속에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설령 그때 엔비디아를 알았다 해도, 지금처럼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잘 나가던 IT 기업들 대부분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세계 IT 산업의 큰 물줄기를 읽지 못했고, 엔비디아라는 이름도 스쳐 지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가 단순 계산을 넘어 추론까지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신 GPT-5 모델을 통해 그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이전보다 넓고 깊은 추론 능력 덕분에 활용 범위도 커졌다. 하지만 이 ‘생각하는 기계’를 제대로 쓰려면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할 몫이 있다. 일을 시키기 전에 배경을 설명하고, 필요한 능력과 원하는 결과물을 명확히 지시해야 한다. 여러 명이 나눠할 일을 ChatGPT 하나가 감당하고, 나는 그 결과를 기다리며 버퍼링을 감내한다. 요즘은 ChatGPT뿐 아니라 Gemini, Perplexity도 함께 쓰며 집단지성의 힘을 끌어다 쓰고 있다.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일하다 보면 동료의 감정을 살펴야 하고, 그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일이 기대만큼 진행되지 않으면 다시 요청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으며 관계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GPT와 함께 일할 때는 그런 감정적 소모가 없다. 지시하면 곧바로 결과가 돌아오고, 원하면 다시 수정할 수 있다. 마치 감정의 마찰을 걷어낸 채, 순수하게 일의 본질만을 주고받는 새로운 방식의 협업인 셈이다.
증기기관이 1차 산업혁명을 열었고, 전기와 내연기관이 2차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이어 반도체와 컴퓨터,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3차 산업혁명이 지식정보화 사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AI 기반 사고가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다. AI, 빅데이터, 융합기술, 초연결성이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데이터로 남고, 그 데이터를 얼마나 잘 추출·조합하느냐가 성공을 좌우한다.
대만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어려운 이민자의 삶 속에서도 끝내 엔지니어의 길을 택했고, 1993년 동료 두 명과 함께 약 4만 달러로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CPU 중심의 시대에 ‘병렬 연산을 위한 그래픽 칩’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게임 산업에서 출발해 과학연구·데이터센터·AI로 영역을 확장시켰다. 오늘날 GPU는 단순한 그래픽 장치를 넘어, 인간의 사고를 모사하는 AI를 움직이는 ‘두뇌’로 자리매김했다. 젠슨 황은 이를 누구보다 먼저 내다보고 기술과 시장을 연결한, 드문 혜안의 소유자다.
그는 기술만 개발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으로 엔비디아를 이끌어왔다. CPU가 지배하던 시대에 GPU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밀어붙였고, 한때 게임용 칩 제조사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AI 시대의 인프라 기업’이라는 명성으로 바꿔놓았다. 또한 그는 엔지니어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스토리텔러였다. 매번 등장하는 그의 ‘가죽 재킷 프레젠테이션’은 단순한 제품 소개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비전 선언에 가까웠다. 엔비디아의 성공은 단지 기술력의 산물이 아니라, 젠슨 황이 기술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방식 자체의 결과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인간의 지능마저 넘어설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히 크다. 나아가 AI의 윤리적 행동을 끝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따른다. 그러나 젠슨 황은 단호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활용이다. AI를 제어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며, 염려에 머물기보다는 AI를 통해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이미 지구 너머를 향하고 있다. AI와 슈퍼컴퓨팅이 열어갈 새로운 프런티어에서, 그는 또 다른 산업과 일자리가 열릴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젠슨 황은 단순한 경영자가 아니라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는 AI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AI 시대에 필요한 리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 그리고 미래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의 힘. 이것이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에서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