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린이 (인생 어린이) #01
쟝 필립 오뎅(Jean Philippe Audin)의 ‘Toute Une Vie’ 앨범을 찾다가 멈칫하고 달력을 본다. 입춘이 지나고 봄이 오는 이 맘이면 생각나는 곡이다. 유독 라디오에서도 자주 흘렀다. 희미한 형광연두 빛의 아지랑이가 머물듯 말듯 하다가 이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1993년 대학 졸업 무렵, 사랑니를 공짜로 뽑을 수 있다는 친구 언니의 부탁으로 친구 서넛이 치과대생의 실습 대상이 되었다. 담당 선생님은 훤칠하니 하얀 얼굴의 남자와 그보다는 작지만 덩치가 있어 푸근하니 성격 좋은 남자였다. 동생 친구니까 특별히 잘해주라는 부탁과 서로들 잘해보라는 의도가 있었음에도, 멀쩡한 이를 뽑아 내느라 덩치 좋은 남자들은 온 힘을 다해 나의 입을 벌리고 비틀고 쪼갰고, 나는 마취가 풀리지 않은 입으로 화장이 지워진 채로 망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그 당시 회기역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하는 그 길목에 작은 레코드 가게가 있었고, 그 앞을 지날 때면 항상 이 곡이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제목은 들어도 몰랐고 아빠 챌리스트와 아들인 듯 함께 있는 앨범 사진만 기억했던 곡이다.
음악은 계절이나 즈음, 장소, 상황, 감정 등을 상기시키고 잠시 시간을 멈춘다. 그 노래와 그 곡이 기억나는 건 당시의 '나'를 노래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 방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졸업하고도 동아리 친구들과 MT 가서 들었던 노래(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전승탑까지 걸으며 들었던 노래(타샤니의 하루하루), 이라크 아르빌에서 출근 차량을 기다리며 들었던 노래(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 속에 내가 있었다.
첼로 곡인 ‘Toute Une Vie’는 불어로 '인생’을 나타낸다. 쿠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유일한 여성 멤버,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도 ‘Toda Una Vida’라고 스페인어로 ‘인생’을 노래했다. 우리나라 바리톤 고성현은 ‘인생이란’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일찍 세상을 떠난 러시아 바리톤 드미트리 호보롭스토브스키(Dimitri Hvorostovsky)는 ‘Kak molody my byli(우리 얼마나 어렸던가)’를 불렀다.
‘Toute Une Vie’의 굵직한 첼로 선율은 안정적인 정박자로 흐르다가 조금씩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따라가는 나의 마음은 편안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이제 됐다며 정리하는데 다시금 휘몰아치듯 감정을 뒤집어 놓고는 끝나버린다. 홀로 남겨진 나는 감정을 추스르며 따라라란 딴따라 따라라라 라라라 ~ 혼자 읊조린다. 3분 여 넘짓 되는 곳을 듣고 듣고 듣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쿠바로 오순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노래, ‘Toda Una Vida’는 내게 말한다. ‘삶이 그렇지 않았니, 기쁜 날도 슬픈 날도 우린 잘 견뎌왔잖아. 앞으로도 이러면서 살아갈 거야’ 라고. 우린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을 살고 있다. 앞으로를 살아갈 나에게 그 모든 것들이 두려워 할만큼은 아니지 않냐며 토닥인다.
실제로 노랫말은 이렇다.
Toda una vida(인생이란)
Me estaría contigo(너와 함께 하는 것),
No me importa en qué forma(세상 기준이 뭐가 중요해),
Ni dónde, ni cómo(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Pero junto a ti(너와 함께 할꺼야)
'인생이란'은 어느 순간 찾아온다. 고성현을 좋아했던 나였지만 사는 것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서 이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함께 가기로 했었지, 사랑이 시작된 후.
영원 하자고 했었지, 그럴 줄 알았었고.
어느새 초록이 지나 앙상한 가지 아래,
너 없이 쓸쓸히 낙엽을 밟으며 혼자 걷고 있네
사랑이든 일이든 사람관계든 영원한 것은 없다. 만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헤어진다. 영원할 거 같았던 기억력, 나는 아닐 줄 알았던 신체 기능들이 헤진다. 하고 싶은 일은 다하며 살꺼라 여겼는데 어느새 인생의 색깔이 초록에서 연두로 그 빛이 바랜다.
목숨 걸고 나를 살아온 내가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하며 초록이 항상 초록일 수 없음을 내비친다.
드미트리의 ‘Kak molody my byli(깍 말로듸 믜 븰리)’는 어린 시절 뭔가 해보려 했던 것들이 헛헛하게 느껴지는 나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날의 치열했던 삶’은 그대로의 의미가 있다며, 사람들에게 그 자신에게 ‘우리 다 그렇게 살아온 거 맞지, 그렇지?’ 라고 말한다.
낯선 나그네여 뒤돌아보시오
당신의 순수한 눈빛이 내겐 익숙하오
아마 당신은 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일까
우리가 항상 자신을 알아보진 못하지만..
세상에 그 무엇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없다오
지나간 청춘 또한 사라지지 아니하오
우리는 얼마나 젊고 또 젊었던가
얼마나 진실된 사랑을 했고, 얼마나 스스로를 믿었던가
(출처: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phantom3&no=8664)
유튜브(https://www.youtube.com/watch?v=GU1jUiXOJpo)속에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들이 많다. 그 속에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은 이런 거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 아무리 말해줘도 모른다. 아는 사람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