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깍. 재생 버튼을 누르자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지지직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의 투명한 속을 가만히 바라보면, 두 개의 작은 바퀴들이 제 속도에 맞춰 굴러갔다. 딸깍.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자 두 바퀴는 언제 움직였냐는 듯,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딸깍. 정지 버튼을 누르자 플레이어의 뚜껑이 열리며 테이프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카세트테이프는 플레이어의 도움이 있다면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손바닥 정도의 작은 크기의 무언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능력이었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 빨리 지나가고 싶을 땐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면 되고, 잠시 이대로 멈춰 땅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으면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모든 것을 멈춰버리면 그만이었다.
딸깍. 되감기 버튼을 누르자 조금은 괴기한 소리를 내며 걸어왔던 기억들을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버튼은 그 어떤 것보다 유혹적으로 들리지만, 가장 조절하기 어려운 버튼이었다. 제때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하면, 자칫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까지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수로 어긋난 시작으로 가게 된다면, 돌아가고 싶었던 시간은 자연스럽게 소멸하며,
비어버린 시간은 바뀐 미래로 채워진다.
한순간의 욕심으로 너의 존재 자체를 잊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더욱 건드릴 수 없었다.
2.
눈을 감았다.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별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달빛이 붉게 비추며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몸을 뉘자, 잡히지 않을 듯 높게 솓아있던 하늘이 한 손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하늘의 별 따기가 가능한 것을 보니, 꿈속임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들이쉬는 숨에 몸속으로 짠 바닷물이 훌쩍 들어왔다가, 내쉬는 숨에 모든 것이 쓸려갔다. 속이 비워질수록 귓가를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자꾸만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 숨을 억지로 참았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빠르게 뛰는 심장에 결국 몇 초 지나지 않아 파하, 하고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파도에 의해 온몸이 조각나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떠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는 의미였으나, 기적처럼 찾아온 환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주머니에 있던 플레이어를 꺼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춰버리자 겁이 났다. 이렇게 혼자가 되어 영원히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숨이 가빠왔다. 따라갈 목소리조차 남기지 않은 채 멈춰버린 시간은 두려움뿐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는 걸까. 머리가 아파졌다.
3.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 찾아와 있었다. 모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건널목을 건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있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앙상한 나무는 어느새 생기를 얻고 작은 새싹을 피우고 있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불안해하는 사이, 겨울잠에서 깨어난 꽃들은 잎을 활짝 피어내고 있었다.
톡톡,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게 식어 있어야 하는 커피가 여전히 처음과 같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4.
쨍한 햇빛이 비치자, 안개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상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목소리가 뚜렷해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져 갔다. 어디 있는 걸까. 어디로 가야 너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도 뚜렷한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고 내뱉었다.
5.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었다.
네가 금이 간 거울을 건너 내게로 다가오는 꿈.
제 몸이 젖는지도 모른 채 달려와서 우산을 건네주고 가는 너를 마주하는 꿈.
영원히 너란 꿈에 사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