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오른쪽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어느 날은 하늘의 색과 바다의 색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파란빛이 마음껏 펼쳐질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이러다 잡아먹히겠다 싶을 정도로 거칠고 뿌연 파도가 무섭게 달려들 때가 있다. 평화와 공포가 반복되는 곳. 세상의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곳.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곳.
나는 바닷가 마을의 대학병원 약사이다.
약 6년간의 런던 생활을 마치고 브라이튼으로 이직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평생 내륙의 도시 생활만 해왔던 내가 바닷가 마을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지만,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인구를 이해하고 돌볼 수 있을까가 가장 걱정이었다. 지역이라는 것은 의료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병원과의 거리뿐만이 아니라 어떤 약을 선택해야 하는지에도 중요한 조건이 된다. 가장 대표적은 예가 항생제다. 지역마다 내성을 띄는 항생제가 다르고 보편화된 세균의 종류가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항생제를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며칠을 투약할 것인지가 치료의 방향을 바꾼다. 또한 항생제마다 투약 가능한 제형이 다르기 때문에 만약 주사제 제형의 항생제를 선택할 경우 환자가 직접 병원으로 올 수 있는지, 출장 간호사가 집을 방문할 수 있는지, 혹은 GP (지역 보건의)으로부터 투약이 가능한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가능하지 않다면 주사제 이외의 제형이 있는지, 경구 등의 다른 방법의 투약으로 전환했을 경우 치료 방향에 변화는 없을지, 비용 효율성은 어떤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공부를 또 해야 한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익숙한 런던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역의 새로운 사람들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감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두려움은 곧 동기가 되었고 설렘으로 바뀌었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브라이튼에 집을 구하기까지 무려 삼 개월이나 걸렸다. 런던에서 브라이튼까지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내려와 집을 알아보았으나, 제2의 런던이라는 명성에 맞게 수요도 엄청났고 월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뜨거운 여름날, 오른쪽에는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가 펼쳐졌고 왼쪽으로는 터덜터덜 걷는 나의 모습이 한 가게의 유리문에 비쳤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새 직장으로 출퇴근을 한 지 3주 만에 겨우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지붕층을 개조한 옥탑방이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집은 아니었으나 마음 편히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집 밖으로 나서면 바로 보이는 "남"의 바다가 그제야 "우리" 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