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86

by 최하루




2086년,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사막 지대를 한참 달려가다 문득 시야가 열리며 눈부신 흰색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건물은 주변과 완벽히 분리되어 마치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듯, 주위를 둘러싼 모래바람조차 닿지 않는 고요한 섬처럼 보였다. 벽면은 매끄러운 세라믹과 강화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햇살이 반사되면 마치 거대한 얼음 덩어리처럼 차갑게 빛났다. 경계선을 따라 촘촘히 설치된 감시 카메라들이 무자비한 눈빛으로 움직임 하나하나를 추적했다. 이곳은 국가 비밀연구소였다. 그 안에서는 한 세기의 과학이 만든 기억 삭제 약물, ‘AMES-9’이 탄생한 장소였다.



AMES-9은 특별한 분자였다. 250mg, 단 5ml의 미세한 용액 속에 담긴 이 물질은 혈액과 뇌를 가르는 경계, 혈액-뇌장벽을 능숙하게 통과해 해마 속 신경 시냅스를 예리한 칼날처럼 정확히 겨냥했다. 그 순간부터 기억은 조각조각 떼어져 사라졌다. 해마에 기록된 기억과 연관된 아미그달라 신경망에 닿는 순간, 감정까지도 함께 녹아내렸다. 마치 오래된 필름이 빛과 열에 닿아 서서히 희미해지해는 것처럼, 과거의 흔적들은 점점 사라져 갔다. 한 번 끊어진 신경망은 두 번 다시 연결될 수 없었다.



좁고 어두운 연구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한결은 오래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른 손끝으로 시험관 뚜껑을 돌리는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빽빽한 유리병들과 실험 기구들 사이로 흐르는 정적은 그를 고요한 섬처럼 감쌌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군의관 가운을 입은 윤하가 들어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바닥에 닿아 고요한 연구실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고, 한결의 가운 끝자락에 바람이 닿았다. 한결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펴고, 입가에 미묘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결은 언제 식어버렸는지도 모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윤하가 들어온 이후로는 그 쓴맛조차 덜 거슬렸다.



"팬트리에 남은 게 이 것 밖에 없네요."



윤하가 들고 있는 바스켓에는 감자, 브로콜리, 옥수수콘, 그리고 김치 통조림 몇 캔이 담겨 있었다. 내일이면 음식 택배가 도착할 테니, 오늘 저녁은 이걸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멤버들은 통조림을 그릇에 덜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텅 빈 냉장고에서 남은 케첩 한 병을 꺼냈다. 윙—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잠시 연구실의 적막을 깼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LED 화면에는 끝없는 해변과 파도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메마른 연구소의 공기와 달리, 화면 속 바다는 모두에게 잠깐의 위안이었다.



이들은 제3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세대였다. 지구의 80% 이상은 폐허가 되었고, 윤리적 충돌과 감시 체계는 이동의 자유조차 제한했다. 그래서 바다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 글과 영상 속에 남아 있는 전설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건조한 이곳. 식욕조차 충분히 채워지지 못하는 이곳에서 어딘지도 모를 화면 속 바다가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다.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음식은 통조림 치고 모락모락 김도 나고 생기를 찾은 모양이다. 그렇게 각자 식기를 꺼내 준비된 음식을 꺼내먹었다.



“있잖아, 바닷물은 강물과 달라서 짜대.”
“그래서 바닷가에 있으면 몸에 소금기가 묻는다는 거구나.”
“우리 엄마가 말로는,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나온 뒤 모래 밟는 느낌이 이상했다고 하더라.”



의미 없는 이야기가 주는 여유 속에서 잠시 웃음이 번지던 그 순간, 공기 중에 타는 냄새가 섞여 들었다.



"무슨 타는 냄새 안 나?"



모두의 얼굴에 갑작스러운 공포가 스며들었다. 코끝을 찌르는 화학 물질의 타는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닥이 깊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곧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지진으로 변했다. 실험대 위의 유리 기구들이 와르르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형광등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다 이내 점멸했다. 연구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본능처럼 3층 메인 연구실을 향해 뛰어갔다. 머릿속엔 단 하나, 최종 제형 안정성을 위해 인큐베이터에 보관되어 있던 마지막 샘플들이었다. 복도 옆 유리창이 연이어 깨져갔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연구원들의 피부에 박히고, 검은 연기가 짙은 입김처럼 빠르게 스며들었다. 연구원들의 가슴은 무겁게 조여왔고, 연기 속으로 숨을 들이쉬자 폐 깊숙이 화염의 독한 냄새가 번졌다. 몇몇은 머리를 휘청이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고,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서려 애썼다. 그 사이에도 고요를 깨뜨리는 폭발음이 거침없이 건물을 흔들었다.



그 혼란 속에서 겨우 윤하와 한결만이 3층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은 연기와 먼지에 얼룩져 있었고, 거친 기침이 계속 흘러나왔다. 불안한 눈빛이 연구원들 사이에서 서로 부딪히며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한결이 인큐베이터를 향해 달려가려는 순간, 윤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한결, 잠깐—"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천장에서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지며 윤하를 내리쳤다. 그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한결이 급히 달려갔다. 윤하는 힘겹게 손을 들어 인큐베이터를 가리켰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가운데에도, 그의 눈빛은 한결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전하려 하고 있었다.


한결은 쓰러진 윤하를 뒤로한 채 인큐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또다시 큰 폭발이 터졌다. 하얀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세상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한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부신 하얀 천장과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를 마주했다. 입안은 바짝 말라있었고, 목구멍이 사포로 긁은 듯 아팠다.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어 움직일 때마다 둔한 통증이 밀려왔다. 특히 왼팔에는 마치 뜨거운 쇠막대기로 지진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맥박에 맞춰 욱신거렸다. 천장의 둥근 조명이 너무 밝아서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2년 전,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정신건강연구원에서 온 첫 연락. 깔끔한 정장을 입은 공무원들이 한결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들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설명했다.



"제3차 세계대전 이후 PTSD 환자가 전 국민의 23%에 달합니다. 기존 치료법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박사님의 신경가소성 연구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계 자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대규모 난민 발생, 도시 폐허화로 인한 집단 우울증. 정신과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자살률은 전쟁 이전의 5배로 치솟았다.



"선택적 기억 삭제를 통한 치료법 개발이 목표입니다. 물론 환자의 동의 하에, 의료진의 엄격한 관리 하에서 만요."



한결은 고민 끝에 프로젝트를 수락했다. 연구비도 충분했고, 최신 장비를 갖춘 건물과 보안도 제공받았다.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명감이 그를 움직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 담당자들 대신 국방부 소속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완전 삭제가 가능한가요?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요."

"대량 적용 시 안전성은 어느 정도 보장되나요?"

"본인이 삭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나요?"



한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치료가 아니라 통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사님, 연구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만 부여해 주시면..."

"혹시 샘플을 좀 더 제공해 주실 수 있나요?"



한결은 꾸준히 거절했다. 연구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건물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기 시작했다. 작은 폭발사고, 원인 모를 가스 누출, 점점 늦어지는 물품과 식량 배달. 마치 누군가의 경고 같았다. 보건복지부는 연락조차 피했다. 이미 국방부와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폭발. 그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한결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 펜던트를 열었다. 다행히 폭발에도 무사했다. 그 속에는 윤하의 사진과 작은 용액이 들어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숨겨둔 마지막 AMES-9 샘플이었다. AMES-9이 그들 손에 넘어가면, 인간의 자유는 휴게실 LED 화면 속 바다처럼 될 것이라 확신했다.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 사라져 버린 것.



한결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결국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혼자 살아남은 자신이 싫었다. 동료들을 구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며칠을 뜬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한결은 한 새벽이 오기 전, 자신이 메고 있던 목걸이의 펜던트를 열었다. 그 속에는 윤하의 사진과 작은 용액이 들어있었다. 한결이 숨겨놓았던 마지막 AMES-9 샘플이었다.



한결은 망설임 없이 용액을 마셨다. 투명한 액체가 혀끝에 스며들면서 금속성의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자신이 수없이 실험했던, 자신이 만들어낸 물질. 이제 그것이 자신의 뇌를 파괴할 차례였다. 그렇게, 한결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