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30분. 한결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에서 나왔다. 어젯밤에도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한참을 뒤척이다 그냥 일어나 버린 것이다. 화이트존의 이른 아침은 다른 구역과 확연히 달랐다. 메트로폴리스 중심가라면 이미 수백 개의 홀로그램 광고판이 하늘을 가리고, 음성 안내가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네온사인도 홀로그램 광고도 없었다. 대신 낡은 벽돌 건물들과 금속 간판들이 아직 어스름한 하늘 아래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건물들은 대부분 20세기말 양식이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3층짜리 상가들, 녹슨 철제 계단이 외벽에 덕지덕지 붙은 주택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이었다. 다른 구역에서는 모든 건물이 스마트 글라스와 나노 소재로 덮여 있어 실시간으로 색깔이 변하고 정보가 표시되는데, 화이트존의 건물들은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감시 드론들조차 이 시간에는 경계 순찰만 할 뿐, 구역 내부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결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드론의 낮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저 드론들은 시민들의 표정과 행동을 실시간으로 분석한다고 했다. 하지만 화이트존에서는 그런 감시가 무용지물이었다. 애초에 이곳 주민들의 생체칩 대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말이다. 한결은 집에서 1층 약국으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을 내려오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른 아침 거리에는 아주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비슷한 모습이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멍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마치 목적지는 있지만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금세 약국 앞에 도착한 한결은 잠시 멈춰 섰다. 자신의 약국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상한 감정이 또 밀려왔다. 뿌듯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공허함. 마치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묘한 기분. 약국 간판에는 'Pharmacy'이라는 영어 단어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언제 만들어진 간판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한결이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오전 8시. 화이트존의 아침은 언제나 같은 소음으로 시작된다. 감시 드론들이 구역 경계를 맴도는 윙윙거리는 소리, 생체칩 검증 게이트에서 나는 알람 소리, 그리고 골목 코너에 설치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CMA (Central Memory Authority; 중앙기억관리국) 방송국의 일일 브리핑.
"오늘도 안전하고 평온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기억은 선택이며, 선택은 자유입니다."
한결은 약국 셔터를 올리며 그 익숙한 멘트를 무의식적으로 따라 중얼거렸다. 매일 듣는 말이지만 여전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기억이 선택이라니. 누가, 무엇을, 왜 선택한다는 건지. 셔터가 완전히 올라가자 약국 내부가 드러났다. 한결은 먼저 공기 순환 시스템을 켜고, 자외선 살균등을 작동시켰다. 그다음 냉장고 온도를 확인했다. 디지털 온도계는 정확히 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2도에서 8도 사이를 벗어나면 안 되는 의약품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한결은 온도 로그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습도계도 확인했다. 45%. 적정 수준이었다. 약국 내부는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파벳 순으로 배열된 일반의약품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Aspirin, benzydamine, cetirizine... 처방전 시스템도 점검했다. CMA와 연결된 디지털 처방전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는지 테스트해 봤다. 시스템이 켜지면서 파란 불빛이 깜빡였다. 정상이었다.
한결의 강박적인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바닥에 깔린 하얀 타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염 하나 들지 않을 항균 타일을 선택해서 깐 것도 청소에 용이하기 위한 한결의 선택이었다. 각 타일 사이의 줄눈까지 완벽하게 일직선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한 한 손님이 그 위에 크게 미끄러진 이후로, 한결은 바닥 전체에 미끄럼 방지 패드를 깔았다. 투명한 실리콘 재질의 패드였는데, 깔고 나니 청소가 두 배로 힘들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약국에서 또 다른 환자를 만드는 것은 절대 싫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결네 약국은 병원보다 깨끗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랬다. 화이트존 내의 어떤 의료시설보다도 위생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병원의 접근성이 현저하게 낮아진 이 시대에 한결네 약국은 작은 병원의 역할도 했다. 2086년 의료 시스템은 완전히 계층화되어 있었다. 상위 10%의 시민들은 AI 의사와 로봇 수술기가 24시간 대기하는 프리미엄 의료센터를 이용하였다. 중간층은 원격 진료 시스템을 통해 홀로그램 의사와 상담, 전자 처방전이 지정된 약국으로 전송되었다. 하지만 화이트존 같이 고립된 하위 구역 주민들에게 의사의 진료와 진단이 아주 최후의 수단이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 생체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정식 의료 시스템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은 한결네 약국을 먼저 거쳐갔다. 한결은 자연스럽게 응급 처치나 기본 진단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전 8시 10분, 첫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60대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손목 위 생체칩 삽입 흔적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생체칩은 다른 구역 사람들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정상적인 생체칩은 손목 안쪽 정맥 위에 직접 이식되어 파란색 LED가 심박수에 맞춰 규칙적으로 점멸했다. 동전 크기의 얇은 원형 디스크 모양이었고, 표면에는 개인 식별 번호가 미세한 홀로그램으로 새겨져 있었다. 터치하면 체온, 혈압, 혈당 수치뿐만 아니라 최근 24시간의 기억 활동 패턴과 감정 상태까지 공중에 투영되어 나타났다. 뇌파를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생각과 감정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고, CMA 서버로 전송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다. 하지만 화이트존 주민들의 칩은 달랐다. 주황빛으로 아주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고, 기억과 감정 데이터 전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소화제 있나요?"
손님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었다.
"네. 어떤 증상이신지요?"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요."
한결은 손님의 눈을 봤다. 초점이 없었다. 마치 카메라 렌즈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것처럼 흐릿하고 멍한 표정이었다. 화이트존에 살면서 종종 보게 되는 표정이었다.
"다른 증상은 없으시고요? 구토나 설사 같은?"
"그냥 소화가 좀..."
대답도 기계적이었다. 마치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 같았다.
"이거 드셔보세요. 하루 네 번, 식후 30분에, 그리고 자기 전에 한 번 드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3일 정도 드셔보시고 그래도 안 좋으면 꼭 병원 가셔야 해요."
하지만 한결은 알고 있었다. 이 손님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화이트존 사람들은 증상이 아무리 심해져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갈 수도 없었고,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손님이 나간 후, 한결은 왼팔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이어진 긴 흉터가 욱신거렸다. 그 흉터는 마치 뜨거운 금속에 직접 닿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직선이 아니라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팔뚝을 가로질렀다. 상처 가장자리는 켈로이드 흉터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날씨가 변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욱신거렸다. 특히 이상한 손님들을 볼 때마다 이 흉터가 아팠다. 더 이상한 것은 흉터 주변의 감각이었다. 만지면 무감각한 부분과 과민한 부분이 섞여 있었다. 마치 신경이 잘못 연결된 것 같았다. 의학적으로는 신경 손상 후 재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이었지만, 한결은 자신이 언제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처가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 이후의 기억이 전체적으로 흐릿했지만, 특히 이 흉터와 관련된 기억은 완전히 공백이었다.
"한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결이 돌아봤다. 수현이었다. 수현이 한결의 약국에 직원으로 들어온 이후로, 약국 손님이 무척 늘었다. 아마 수현 특유의 다정함과 사교성 덕분일 것이다. 수현이 오면 약국 분위기가 확실히 밝아졌다.
"어, 수현아. 일찍 왔네."
"응. 집에서 잠이 안 와서."
수현은 가방을 카운터 아래에 넣으며 말했다. 수현의 가방도 독특했다. 군용 백팩 스타일이었는데, 여러 개의 주머니와 고리들,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인형 두 개가 달려있었다. 화이트존 주민들 치고는 너무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가방이었다. 한결은 문득 수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일한 지 8개월이 넘었는데도 수현의 과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이트존에서는 그런 게 자연스러웠다. 모두들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현아, 너는 언제부터 화이트존에 살았어?"
"응? 갑자기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나보다 동네 사정을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수현이 잠시 멈칫했다. 손을 가방 끈에 올린 채로 몇 초간 멈춰 있었다. 마치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계산하는 것 같았다.
"그냥 사람들이랑 말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한결은 좀 조용한 편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한결은 손님들과 업무적인 대화 외에는 별로 나누지 않았다. 반면 수현은 손님들의 안부를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상담까지 해줬다. 그래서 손님들이 수현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방금 나간 분, 또 오셨구나."
수현이 말했다.
"또?"
"응. 이번 주에만 세 번째야. 계속 소화제만 사가시더라."
한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결은 대부분의 손님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손님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마치 같은 사람이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한결은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데 천재적이었다.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얼굴이 구별되지 않기 시작했다. 모두 똑같은 멍한 표정, 똑같은 초점 잃은 눈동자, 똑같은 기계적인 말투. 앞서 뭘 드렸었더라? 이것도 안 되면 오늘 사가신 것도 별 효과가 없을 텐데. 걱정이 드는 한결이었다.
"한결아, 팔 아파?"
수현이 한결이 왼팔을 연신 문지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응. 좀."
"병원 가봐. 계속 아프면 안 좋을 텐데."
"괜찮아. 그냥 신경성인 것 같아."
한결은 대답하면서도 수현의 표정을 유심히 봤다.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수현도 이 동네에 산 지 얼마 안 됐지만, 한결보다는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특히 화이트존의 '특별한 손님들'에 대해서.
오전 8시 30분,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손님들과 달리 생체칩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손목 위를 자세히 봐도 삽입 흔적조차 없었다. 이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생체칩은 출생 직후 48시간 이내에 의무적으로 삽입되는 것이었다. 칩 삽입 과정에서 혈관과 신경 조직이 일부 손상되기 때문에, 삽입 부위에는 영구적으로 작은 흉터가 남았다. 설령 어떠한 이유로 후에 칩을 제거한다 해도 그 흔적은 남아야 했다. 그런데 이 손님의 손목은 완전히 깨끗했다. 마치 애초에 칩을 삽입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21세기 중반부터 시행된 전 세계적 생체칩 의무화 정책을 피해 간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진통제 있나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첫 번째 손님과 달리 이 손님에게는 감정이 있었다. 공포와 불안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어떤 부위가 아프신가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손님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한결은 그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었는데, 얼굴 곳곳에 작은 상처와 멍자국이 있었다. 신선한 상처들인 것을 보니 아마 며칠 전에 생긴 것 같았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손님의 완전히 정상적인 눈이었다. 초점도 뚜렷하고, 감정도 살아 있었다. 화이트존에서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본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에 넘어지시거나 머리를 부딪히신 적은 없어요?"
손님은 그저 알 수 없는 통증에 약을 찾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두통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이 정도의 통증 정도면 약국에서 해결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었다. 동공 반사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렇다고 마약을 한 동공은 아니었고.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한결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진통제 드려볼게요. 하루 두 알 최대 네 번, 필요할 때마다 드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손님이 나간 후, 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한결아, 방금 그 사람... 생체칩 자체가 없었어."
"응, 나도 봤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법적으로 모든 시민은..."
"몰라. 화이트존은 원래 예외가 많으니까, 뭐."
한결은 수현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아무리 화이트존이 감시 사각지대라고 해도, 생체칩 삽입은 출생과 동시에 이뤄지는 의무적 절차였다.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예외가 많다고 대답하는 한결 스스로도 자신의 답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화이트존은 원래 이래왔다. 늘 모든게 틀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야 상처가 있는 팔이 아프지 않았다. 마치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오전 10시쯤, 세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3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역시 손목 생체칩이 깜빡이지 않았다. 걸음걸이부터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몸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정했고, 균형을 잡기 위해 계속 벽을 짚어가며 걸었다. 얼굴도 이상했다. 표정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수면제 있나요?"
목소리도 어눌했다. 혀 또한 잘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처방전이 필요한 의약품입니다. 가까운 병원에서..."
"아, 그냥... 멜라토닌 같은 것도 괜찮아요."
한결은 일반의약품 멜라토닌을 꺼내며 손님을 관찰했다. 손목에 깊은 상처 자국들이 있었다. 자해 흔적처럼 보였지만, 뭔가 다른 종류의 상처였다. 마치 뭔가에 묶였던 것 같은, 반복적으로 생겼다 사라진 멍의 흔적이었다.
"잠들기 1시간 전에 한 알씩 드시면 돼요. 다만 매일 드시는 건 좋지 않아요. 일주일 정도만 드셔보시고, 그래도 좋아지지 않으면 병원 가보셔야 해요."
"감사합니다."
손님이 나간 후, 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한결아."
"응?"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뭐가?"
"이 동네 사람들. 다들 비슷한 증상으로 와. 소화불량, 불면증, 두통, 불안감... 그리고 다들 칩이 깜빡이지 않아."
한결은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달았다. 정말로 화이트존 주민들의 디지털 메모리 칩은 다른 구역 사람들과 달리 활성화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신경학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것 같은 증상들이었다.
"그게... 중요한 거야?"
"글쎼, 그냥 궁금해서."
수현의 목소리에 뭔가 더 깊은 의미가 담긴 것 같았지만, 한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증보다는 피곤함이 먼저 몰려왔다. 마침 새로운 택배들이 약국 앞으로 도착했다. 드론으로 도착한 택배에 한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오른 손목을 내보였다. 한결의 생체칩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드론은 한결의 메모리칩을 스캔한 후 회색 빛의 하늘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한결과 수현은 더 이상 대화를 멈추고 새로 도착한 약들과 의약품들을 약국 안으로 나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수현이 건너편 카페에서 커피를 사 왔다. 심플한 디자인의 일회용 컵이었는데, 로고나 상호명 대신 추상적인 기하학 패턴만 그려져 있었다. 한결은 그 패턴을 보고 단 한 번도 딱히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았다. 마치 이곳, 화이트존처럼 말이다.
"자, 여기. 크림 라테."
"고마워, 수현."
"성격은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 같이 생겨가지고."
"너야 말로. 아메리카노 안 쓰냐?"
대충 집에서 싸 온 점심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며 오후 영업을 준비하던 두 사람이었다.
"건너편 카페,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응? 궁금해?"
"아니, 그냥."
"좋은 사람이야. 조용하고 성실하고. 너랑 비슷한 면이 있어."
한결은 카페에 대해 물었는데, 수현은 그 카페의 주인에 대해 답했다. 한결은 그래도 딱히 불필요한 정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결을 보며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너편 카페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