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목소리

by 최하루



오후 3시. 약국 정리를 하던 한결이 문득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약국에 진열된 의약품들처럼,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항생제들처럼 마치 차가운 무기물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감정이 없는 표정을 하고 살게 되었을까. 얼굴의 근육들이 생명력 없이 굳어있었다.



머릿속에 섬광 같은 이미지가 스쳤다. 불꽃이었다. 거대하고 뜨거운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리 기구들이 열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면서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화학 물질들이 탈 때 나는 독특한 냄새가 지나갔다. 그리고 비명소리. 여러 사람들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명하게 들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다.



'한결! 여기!'



누군가 한결의 이름을 절박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 하지만 그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절규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지와 함께 몰려온 감정은 절망이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압도적인 상실감.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죄책감과 무력감.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한결의 왼팔 흉터가 불타는 듯이 아팠다. 마치 그때의 열기를 다시 느끼는 것 같았다.



"한결아, 괜찮아?" 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요즘 자주 그러는 것 같은데."



맞았다. 한결은 최근 몇 주 동안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상 같은 꿈이었다. 뭔가 타고 있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꿈. 깨어나면 왼팔 흉터가 욱신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꿈이 꿈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마치 과거의 어떤 기억을 재생하는 것 같았다. 특히 불꽃의 색깔과 온도, 연기 냄새까지 모든 것이 실제 경험한 것처럼 생생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꿈에서 느끼는 감각들이 너무 실제적이었다. 화염의 열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 연기가 폐로 들어와 숨이 막히는 느낌,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이 발에 박히는 느낌까지. 일반적인 꿈에서는 이런 물리적 감각을 이렇게 선명하게 느낄 수 없었다.



"팔은 언제 다친 거야?" 수현은 한결의 왼팔에 시선을 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 아예?"

"어. 대학 졸업하고 여기 오기까지의 기억이 좀 흐릿해."



한결도 정확히 언제부터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여기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려고 하면 머리가 좀 아프기도 하고.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첫인상부터 남달랐다. 화이트존 주민들 특유의 피곤하고 무기력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어깨를 곧게 펴고 들어온 그 여성의 걸음걸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목적의식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이상한 건 그 여성의 손이었다.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장갑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부분이 얇은 전도성 소재로 되어 있어서 터치스크린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스마트 장갑은 아니었다. 손등 부분에 미세한 LED가 깜빡이고 있었고, 손목 근처에는 작은 디스플레이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항불안제 있나요?"



그 여성의 목소리는 한결을 더욱 놀라게 했다. 화이트존 주민들 대부분이 흐릿하고 무기력한 말투를 쓰는 것과 달리, 이 여성의 발음은 정확하고 또렷했다. 오랫동안 다른 곳에서 살다가 최근에 이곳으로 온 사람 같았다.



"항불안제는 처방전이 필요합니다."

"그럼 처방전 필요 없는 걸로 주세요. 뭐가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도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 화이트존 주민들은 뭐든 좋으니 아무거나 달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여성은 선택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가지가 있어요. 둘 다 CMA 승인받은 2등급 신경안정제라 생체칩 로그에도 안전하게 기록돼요."

"이걸로 할게요."



한결이 포장을 하는 동안, 여성은 돈을 내기 위해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한결은 무의식적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장갑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손은 예상과 달랐다. 손등에는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마치 주삿바늘에 찔린 것 같은 점 모양의 상처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손가락 끝이었다. 검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 끝에 피부 표면과 완벽하게 일치한 작은 금속 조각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한결은 약을 건네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더 자세히 봤다. 한결의 시선을 느낀 여성은 재빨리 장갑을 다시 꼈다.



"감사합니다."



손님이 약국을 떠난 후, 한결은 수현에게 말했다.



"방금 그 손님, 좀 이상했어."

"왜?"

"손가락에 뭔가 심어져 있더라."

"아, 그런 거 가끔 봐. 화이트존 사람들이 워낙 다양해야지."



수현은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다들 사연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아."

"그러게. 한결이 너도 여기 온 지 꽤 됐잖아? 몇 년 됐더라?"

"음...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

"아, 그래?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어차피 다들 과거 얘기 잘 안 하니까."



수현의 말이 맞았다. 화이트존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규칙 같은 것이 있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만 살면 되는 거라고. 하지만 한결에게는 그 현재마저도 흐릿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오후 5시. 약국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온 손님은 고작 일곱 명. 모두 비슷한 증상, 비슷한 표정, 비슷한 분위기였다. 마치 같은 사람이 일곱 번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결아, 먼저 갈게."

"어, 고마워. 내일 봐."



수현이 나간 후, 한결은 혼자 남아 하루 매출을 정리했다. 화이트존은 감시 사각지대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거래 내역은 여전히 CMA 시스템에 자동으로 전송됐다. 다만 실시간이 아닌 일일 배치로 처리될 뿐이었다. 한결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오늘 판매한 의약품 목록을 확인했다. 소화제, 멜라토닌, 두통약, 불안을 줄여준다는 한약재. 모두 정신적 스트레스와 관련된 약물들이었다. 마치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고통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한결은 자신도 그중 한 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없는 표정, 설명할 수 없는 흉터, 반복되는 악몽.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의 공백. 대학 졸업 이후부터 이곳에 정착하기까지의 기억이 유독 흐릿했다. 한결은 왼팔 흉터를 다시 만져봤다. 이 상처는 분명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할 때마다 통증만이 올라왔다. 통증에 얼굴이 찌푸려진 한결은 바로 생각을 멈췄다.



약국 위 옥탑방에서 사는 한결은 약국 건물 뒤편에 있는 외부 계단을 걸어 올라가 금세 집에 도착했다. 옥탑방은 작았지만 한결에게는 충분했다. 원룸 구조에 작은 마당이 딸려 있었다. 마당이라고 해봐야 3평 정도의 공간이었지만, 화이트존에서 이런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한결은 작은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이트존 위로는 감시 드론 대신 별이 보였다. 다른 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치 이곳만은 정말로 다른 세상인 것처럼. 하지만 그 별빛 아래서도 한결의 가슴은 여전히 공허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기분. 그리고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악몽에 대한 두려움.



샤워를 하면서 한결은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봤다. 왼팔 흉터 외에도 곳곳에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언제 생긴 건지 기억나지 않는 상처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한결은 잠에 들기 두려웠다. 또 악몽을 꿀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로감이 두려움보다 강했다. 한결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악몽이 시작됐다.



거대한 실험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중앙에 배치된 복잡한 실험 장치들. 그리고 갑자기 터지는 폭발.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비명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한결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지만,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없다. 왼팔에 뜨거운 금속 조각이 떨어져 살을 태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리는 목소리.



'미안해.'



한결이 깨어났을 때는 새벽 4시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왼팔 흉터가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꿈속에서 들은 그 목소리였다. 분명히 아는 목소리 같은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는지. 악몽의 끝에는 그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한결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봤다. 화이트존의 밤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았다. 한결은 다시 침대에 누워 익숙한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약국 문을 열고, 비슷한 손님들을 맞고, 또 같은 악몽을 꾸고. 한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악몽 말고, 제발 좀 다른 꿈을 꾸고 싶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