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사람들

by 최하루



밤의 화이트존은 낮과 다를 바 없는 정적에 잠겨 있었지만, 그 고요함은 오히려 더 짙고 낯설게 다가왔다. 버려진 도시의 한 모퉁이를 잘라낸 듯, 이곳은 세상에서 도려낸 그림자 같았다. 가로등은 제 수명을 다해가며 허옇게 깜빡거렸고, 그 빛이 닿는 자리마다 낡은 아스팔트 위에 기형적인 누런 웅덩이가 흩뿌려졌다. 불빛과 불빛 사이의 간극은 끝없이 깊어 보였고, 그 어둠 속에서는 이름 모를 존재들이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마저 그 침묵에 압도당해 본능적으로 가벼워졌다. 윤하는 카페 뒤쪽 외부 계단에 앉아 원두의 자향이 온몸에 배어든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윤하의 카페는 조용했다. 하루 종일 손님이라고 해봐야 대여섯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사라졌다. 그들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공허했다. 윤하는 그들을 속으로 ‘빈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한 시간씩 멍하니 앉거나 커피를 홀짝이며 사라지는 모습에서, 그 공허함이 카페 안에 물결치듯 스며들었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오직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 소리, 휘핑기와 볼이 부딪히는 소리, 오븐과 냉장고가 돌아가는 낮은 윙윙거림뿐이었다. 윤하조차 자신이 왜 이 공간에 카페를 열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이곳이어야 한다는 강렬한 직감만이 마음을 지배했다. 그녀는 그 직감을 따랐고, 카페의 모든 사물과 공기가 오래전부터 자신을 기다려온 듯 느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한 윤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앞치마를 도로 맸다. 큰 보울에 계량한 크림을 붓고, 계량한 수제 바닐라빈 시럽을 넣은 후, 휘핑을 치기 시작했다. 시그니처 메뉴인 크림라테는 진한 아메리카노 위에 하루 동안 숙성한 크림을 올린 음료였다. 바닐라 크림의 달달함과 쌉싸름한 커피가 어우러져 윤하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그렇게 준비한 크림을 냉장고에 넣은 후, 키친의 불을 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윤하가 이 공간에 카페를 차릴 때는 지하에 이미 오래전부터 세입자들이 있었다. 임대인 말로는 예술인들이 모여 산다고 했고, 타투 스튜디오를 운영한다고 했다. 그렇게 지하의 타투이스트들은 윤하의 소중한 단골손님들이 되었다. 낮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가끔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림자를 스칠 때면 묘하게 이질적인 기운이 남곤 했다. 그럼에도 윤하에게 그들은 소중한 단골손님이자,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커피를 건네는 이웃이었다. 그녀의 하루는 늘 지하 스튜디오 문 앞에 네 잔의 따끈한 커피를 내려놓는 일로 시작된다.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서서히 흩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굳게 닫혀 있던 지하 스튜디오의 문이 미묘하게 벌어져 있었다. 낯설게 드러난 틈은 윤하를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 윤하는 문틈으로 몸을 기울였다. 익숙했던 금속 냄새 대신 차갑고 정체 모를 공기가 스며 나왔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발을 들여놓자, 안쪽에는 의외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문 바로 뒤에는 또 다른 회색 벽이 버티고 있었는데, 마치 의도적으로 공간을 가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순간, 발이 헛디뎌 균형을 잃은 윤하는 본능적으로 벽에 손을 짚었다. 본능적으로 벽에 손을 짚는 순간 느껴진 것은 단단함이 아닌 묘한 유연함이었다. 돌처럼 굳어 있어야 할 벽은 안쪽으로 천천히 밀리며 기이한 소리를 남겼다. 벽이 움직이며 드러난 곳에는 또 다른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의 끝으로 향할수록, 미세한 기계음이 섞여 흐르며 어둠 속에 감춰진 공간이 서서히 드러났다. 윤하는 숨을 고르며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던 중, 뒤돌아본 철문이 이미 조용히 닫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공간은 일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들이 파란빛을 토해내고 있었고, 복잡한 배선으로 연결된 컴퓨터와 기계들이 낮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섞어 있었다. 중앙에 놓인 아주 긴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에는 수많은 서류들이 정교하게 분류되어 쌓여 있었다. 윤하가 커피를 테이블 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순간, 서류 더미 사이로 보이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극비, 분류, 삭제 대상자. 심장이 빨라졌다. 윤하는 더 깊숙이 들어가며 주위를 돌라봤다. 왼쪽 벽면에 걸린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추상적인 예술 작품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뇌의 단면도. 아니, 정확히는 해마와 내 후각피질의 정밀한 3D 모델이었다. 옆쪽 벽에는 복잡한 화학 구조식들이 화이트보드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인 메모들이 있었다.



"AMES-9... 시냅스 억제..."



윤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발음한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입 안에서 그 단어들이 굴러다니는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잊고 있던 모국어를 다시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너."



윤하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매우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목 뒤의 잔털이 곤두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동안 심장이 귀에서 쿵쿵거렸다. 그리고 보았다. 짧은 머리에 양팔에 문신이 새겨진 사람이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겨누고 있었다. 그 검은 물체가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검은 총구.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검은 총구는 정확히 윤하를 겨누고 있었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위험할 것 같아 몸을 움츠렸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윤하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만 들렸다. 쿵쿵, 쿵쿵. 마치 큰 북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 위층..."



그제야 상대방이 윤하를 알아본 듯했다. 총구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닥을 향했다.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들어와서..."



하지만 윤하의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고,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윤하는 총을 실제로 본 게 처음이었다. 차가운 금속의 무게감이 공기를 통해 전해져 왔다. 윤하는 놀란 마음에, 지우는 윤하를 놀라게 했다는 마음에 짧은 몇 초 동안 서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짧은 정적을 깬 건 윤하였다. 윤하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커피를 가리키자, 지우는 그제야 윤하의 의도를 깨닫고 경계를 풀었다. 지우가 커피를 캐리어에서 꺼내는 동안, 윤하는 지저분히 널려있는 서류 속 '피해자 목록'이라 적힌 파일을 보게 되었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우가 윤하를 정식으로 그들의 공간에 초대했다. 카페 마감을 조금 일찍 한 날, 윤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타투 스튜디오'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서류에 파묻혀 있던 테이블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윤하는 단번에 알아챘다. 윤하가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눈을 돌리자, 곳곳의 숨겨진 공간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하지만 그 정리된 모습이 오히려 더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윤하는 단번에 알아챘다. 이곳은 일반적인 공간은 아니겠구나. 이들도 화이트존에 살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구나, 하고 말이다.



"민재라고 합니다. 의사예요."



민재는 지우보다 좀 더 친근함을 표했다. 초록색 스크럽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에는 알 수 없는 얼룩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눈가에는 깊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의사가 왜 이런 곳에 있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더 안쪽에서 급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아, 위층 카페 사장님이시군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안경을 쓰고, 편해 보이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저는 재희예요. 데이터 큐레이터라고, 기억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해요."

"기억을 수집... 한다고요?"



윤하의 질문에 재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억들, 삭제된 기억들을 찾아서 정리해요. 도서관 사서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만, 저희가 다루는 책들은 지독하게 아픈 이야기들이죠."



재희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반투명한 유리 케이스에 담긴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낡고 바랜 사진 속에는 재희와 비슷한 얼굴의 누군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재희는 곧 시선을 거두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너무 많이 말하지 마."



모든 시선이 경고하는 듯한 목소리 쪽으로 일제히 향했다. 어둠 속에 앉아 여러 개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던 사람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밀며 윤하가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의자 바퀴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창백한 얼굴에 깊게 파인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모니터들의 차가운 빛이 그 얼굴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든입니다. 암호 깨는 일 해요. 아, 지우 쟤는 진짜 타투이스트 맞아요."



윤하는 이 네 사람이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표면적으로는 예술가, 의료진, 큐레이터, 암호 전문가라고 소개했지만, 이 조합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윤하가 조심스럽게 질문하려던 순간, 이든이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 손님 왔어요. 건너편 약국 쪽 분이요."



윤하는 자신의 질문과 관련 없는 뜬금없는 이든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런 윤하의 표정을 단번에 이해한 이든은 모니터 중 하나를 돌려서 윤하에게 보여줬다. 화면에는 건물 전체의 내부가 실시간으로 보였고, 한결이 메뉴판을 보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윤하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섬뜩했다.



"그럼 제가 평소에 하는 일들도 다 보셨다는 거예요?"

"필요할 때만요.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이든의 대답은 냉정했지만, 윤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꽤 불쾌하게 느껴졌다.



"어서 올라가세요.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요."



재희가 윤하의 어깨를 가볍게 밀려 말했다. 윤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출구 쪽으로 향하려는 그때, 지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왜냐고 묻는 윤하에, 지우는 우리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했다. 그 말에는 어떤 절실함이 담겨 있었고, 윤하는 그들이 단순한 예술가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지우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지하는 완벽한 비밀의 공간이 되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정말로 손님이 있었다. 건너편 약국의 사람, 한결이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 뒤로 뭔가 불안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윤하는 놓치지 않았다.



"크림 라테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맞으시죠?"



윤하는 익숙한 듯 카운터로 가며 인사를 건넸다. 한결은 잠시 윤하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하는 원두를 갈며 방금 전 지하에서 본 것들을 생각했다. 기억 삭제, AMES-9, 피해자 목록... 왜 모든 것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지하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투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가장 이상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소리 만이 카페 안을 채웠다. 한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모습이 윤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둘 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말이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한결은 컵을 건네받으며 건조한 눈으로 윤하를 응시했다. 한결은 커피 값을 지불하고 카페를 나섰다. 윤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창문 너머로 한결이 약국으로 들어가 동료에게 커피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윤하는 그런 한결을 뒤로한 채 다시 지하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하 사람들이 숨기는 일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고, 무엇보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매일 잡고 내려가던 계단의 철 손잡이가 유독 차갑고 까칠하게 느껴졌다. 윤하는 언제 열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굳게 잠겨있는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치 다시 윤하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의 이든이었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윤하의 질문에 네 사람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니터들의 파란빛이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비추며 지나갔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컴퓨터 팬 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윤하 씨, 혹시 기억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재희의 질문에 윤하는 눈을 깜빡였다. 질문이 예상밖이어서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재희의 눈빛이 유독 진지해 보였고, 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윤하의 반응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윤하의 대답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아니, 그냥... 혹시 과거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나 싶어서요. 특히 이 카페를 차리기 전 일들 말이에요."



민재가 재희의 말을 이어받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물었다. 윤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무의식적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막상 대답하려고 하자, 입 속이 바짝 말라왔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윤하는 자신의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어제 일은 선명했다. 그저께도, 지난주도. 하지만 한 달 전,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억이 흐릿해졌다. 마치 오래된 사진이 바래는 것처럼. 이 카페를 차리기로 결정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 건물을 처음 본 날은? 화이트존에 정착하기 전에는 어디에 살았을까? 윤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가끔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없으세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나,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에요."



민재의 부드럽지만 예리한 질문에 윤하의 심장이 빨라졌다.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느끼는 그 막연한 상실감, 뭔가 소중한 것을 어딘가에 놓고 왔다는 불안감, 카페에서 커피를 내릴 때마다 스치는 기시감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윤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왜 하필 이 건물을 선택했는지, 카페 인테리어를 할 때 왜 그렇게 확신에 찬 결정들을 내릴 수 있었는지. 마치 이미 머릿속에 완성된 그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기억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윤하는 자신을 변호하듯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지우가 천천히 의자를 윤하 쪽으로 끌어와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윤하 씨, 방금 전에 저희 벽에 걸린 뇌 모델을 보셨을 때, 'AMES-9'라는 단어를 정확히 읽으셨어요. 그리고 '시냅스 억제'라는 표현도 사용하셨고요."



윤하는 얼굴이 하얘졌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은 있었지만, 왜 그 단어들을 알고 있는지는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 단어들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의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용어를 모르거든요."



이든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윤하는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았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손가락 끝이 저리기 시작했고, 시야가 약간 흐려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어요. 기억을 되찾는 일이요."



민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 한마디가 지하 공간의 공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기억을 되찾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삭제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요. 숨겨져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자의던, 타의던 삭제 돼버린 기억을 되찾는 사람들이에요. 리커버러(Recoverer)라고 하죠."



리커버리라. 윤하는 그 단어를 천천히 되뇌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기억 삭제는 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을 때?" 재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깊은 슬픔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처음엔 모두 그렇게 생각해요."



민재가 의자를 끌어와 윤하 옆에 앉았다.



"윤하 씨, 카페에 오시는 손님들 중에 이상한 분들이 있지 않았나요? 말을 거의 안 하고, 멍하니 앉아 계시다가 가시는 분들."

"맞아요."

"그분들이 정말 자기 의지로 기억을 지웠을까요?"



윤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려보니, 평화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들이었다. 이든이 모니터에서 무언가를 불러와 윤하에게 보여줬다.



"이게 지난 3년간 정부에서 공식 승인한 기억 삭제 건수예요."



화면에 숫자가 떠올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숫자였다.



"하지만 이건 공식 기록이에요. 실제로는..."



지우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숫자가 10배 이상 더 컸다.



"대부분은 본인도 모르게 삭제당해요. '치료'라는 명목으로, '사회 안정'이라는 이유로. 어떤 때는 정부에 불리한 목격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기억만 쏙 빼내죠."



윤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 동의서는요?"

"모두 조작이에요. 기억을 지운 다음에 '본인이 원했다'는 거짓 기록을 만들어놓죠. 당사자는 기억이 없으니까 반박할 수도 없고요."



재희가 파일 하나를 윤하 앞에 놓았다. 파일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 파일들은 우리가 복원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예요. 읽어보세요."



윤하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열었다.



김민수(37세) - 정부 건설 사업 비리 목격 후 기억 삭제. 본인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로 기록됨.

박연아(29세) - 대기업 회장 성폭행 피해자. 사건 직후 '정신과 치료'라는 명목으로 관련 기억 전체 삭제.



세 번째, 네 번째... 파일들은 끝이 없었다. 각각의 사연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이게 다 진짜예요?"

"네. 그리고 윤하 씨 카페에 오시는 분들도 아마 대부분 이런 분들일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뭔가 잃어버린 걸 찾으려고 화이트존으로 모여들어요."



윤하의 손이 떨렸다. 그동안 보아온 '빈 사람들'이 사실은 이런 피해자들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공허한 표정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럼 왜 아무도 문제제기를 안 하는 거예요?"



지우가 쓸쓸하게 웃었다.



"기억이 없으면 피해를 당했다는 것조차 모르죠. 그리고 설사 의심한다 해도, 증거는 모두 정부가 쥐고 있어요. 법적으로는 완벽한 범죄예요."



윤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 저도 혹시..."

"모를 일이죠. 그리고, 윤하 씨가 이 건물에 카페를 연 것도 우연은 아닐 거예요."



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기억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일이."



윤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네 사람을 바라봤다. 이들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잃어버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두려움도 몰려왔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기억도 삭제된 것이라면, 설령 그 기억을 되찾는다 해도 과연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윤하 씨, 이제는 선택하셔야 해요. 모른 척하고 평범하게 사시거나, "



아니면 우리와 함께 싸우거나. 재희의 말에 윤하는 카페에서 봤던 '빈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공허한 눈빛, 뭔가를 찾는 듯한 몸짓들. 윤하는 평범한 카페 사장으로 살아가는 것과, 위험하지만 진실을 찾는 일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의 말이 맞다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자신이 왜 하필 이 건물을 선택했는지, 왜 '빈 사람들'이 자꾸 카페에 찾아오는지, 왜 한 결과 수현이 자신에게 묘하게 친숙하게 느껴지는지.



"제가...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우리에게는 윤하 씨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윤하의 대답에 네 사람이 모두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동지를 맞이하는 기쁨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죄책감이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윤하는 리커버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느꼈다. 설사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길이 될지라도. 이곳, 화이트존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 조용한 카페에서, 모든 진실이 시작될 것이었다.



밤이 깊어갔다. 화이트존의 고요함 속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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