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3화: 불타는 감자 튀김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by 평범한 J

이게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쓰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제 그냥 대충 쓴다. 쓰는 데 의의를 두는 것으로.


HSM 코스에는 신청한 모든 나라의 학생이 수강한다. 미국인, 인도인을 비롯해 BCC에 없었던 친구들까지 듣는 것. BCC에서 미국인들이 오면 여기가 자기네 것인 것처럼 점령할 거라더니... 미국인이 말을 많이 할 거기 때문에 생각하지 말고 말 먼저 뱉으라더니.. 모두 사실이었다... 그들은 말도 많이하고 말이 빨랐다. 인도인은 말도 많이하고 말이 빨랐고 인도식 억양을 곁들여서 (안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말했다. 결론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HSM은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요일엔 간단한 오티, 환영 인사. 월요일부터 정규 수업 시작이다. 9시에 시작해서 17:30에 끝난다. 점심 시간엔 "밥을 먹으면서" 화이자, 릴리, J&J 회사에서 점심을 제공하고 케이스 스터디를 한다. 하루 종일 영어만 들으니까 영어가 물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영어가 물린 적이 얼마 안되는데 (당연하다. 영어가 물릴 정도로 단기간에 빡세게 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은 인턴 지원을 앞두고 대학생 여름 한 달 동안 토익 학원을 아침 7~11시까지 듣고 하루종일 토익 공부만 했을 때, 두 번째는 MBA 지원을 위해 회사 퇴근 후 저녁 시간에 토플을 들어서 월수금 저녁반을 들으며 공부할 때, 세 번째는 감히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상 월요일은 최악의 날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데 알아 듣는 게 없다. 미국인들이 질문할 때 뭔 내용인지 안들린다... 설령 들린다 한들 헬스케어 산업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니 이해하지 못한다. 와중에 팀플도 해야한다. 뭘 해야되는지, 얘네가 뭘하고 있는지 전혀 방향을 못 잡고 혼자만 오리무중에 빠졌다... 이렇게 자괴감이 든 날이 입시 끝난 뒤로 꽤 오랜만이다... 그렇게 긴 긴 하루가 끝났다. 집에 와서 점심에 먹었던 음식을 오븐에 데펴먹는데 오븐 천장과 접시가 너무 가까웠는지 감튀와 빵에 불이 붙었다.. 불타는 감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순간 연기가 너무 많이 나서 화재 경보가 울리면 어떡하지, 소방차가 와야되나 등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어른. 먼 타지로 온 어른. 접시를 잡고 감튀에 입김을 불으니 불이 꺼졌다. 정신이 나가긴 나갔나보다... 다음에 오븐 쓸 때 조심하자...

그렇게 2일차가 되자 목표를 바꿨다. 수업을 듣는데 아 어차피 들어도, 안들어도 내용 모르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냥 째고 내 할 거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친한 언니가 님 비싼 등록금 내는 거라고 뼈를 때렸다. 정신을 차렸다. 수업 시간 중에 자리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목표를 바꾸니 한결 마음이 편하고 그냥 그 시간에 딴 생각을 하든, 이해해서 듣든, 아마존에서 살 물건을 리스트업하든 그냥 자리를 지켰다. 그것으로 만족해보기로.. 한국 동기 언니가 그랬다. 첫 술에 배부를 생각하지 말자고. 맞다. 산업도 처음이고 미국인도 인도인도 처음이다. 데이타를 다따라고 발음하는데 정말 쉽지 않더라.... 너네도 내 발음 모르겠는 건 매한가지겠거니...


와중에 목요일 마지막 강의가 정말 HSM 코스 중에서 하이라이트였다. 환자의 health equity를 증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던 렉쳐였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헬스케어 분야에 대한 확신을 다시 한 번 갖고 이 산업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시간.

금요일에 드디어 발표를 하고 피어 평가를 했다. 난 진짜 쌀 한 가마니마냥 가만히 있어서 내 점수를 가장 적게 주고 다른 친구들에게 적절히 높은 점수를 배분했다. 발표 끝나고 내가 영어 못해서 기여를 많이 못해서 미안해. 다음엔 내가 더 발전된 모습으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 라고 보내니까 제이 너 정말 잘했어. 우리 다 잘했어. 같이 또 일하면 좋겠다! 하는 스윗한 답장이 와서 눈물이 찡했다... 진짜 착해서 그런건지 속으론 다른 생각을 품은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말해주다니 고마웠다...

얘들아 나 진짜 잘하고 싶었는데 컨설턴트 친구가 구조 휘리릭 짜고 내용도 파파팍 채워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사실 피피티 예쁘게 고치고 싶었는데 너네가 흰 바탕에 깔끔한 버전을 다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차마 이걸 내가 더 잘 바꿔보겠다고 말하기 어렵더라... 그래도 금요일 정도 되니까 낯가림이 풀려서일까.. 좀더 컨텍스트가 생겨서일까... 너네랑 말하는 게 좀더 편해졌단다... 이제야 적응했는데 부트캠프가 끝나버렸다...


이번 BCC, HSM 부트 캠프를 통해 알게 된것: 나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구나. 그렇다. 실제로도 느린 사람이었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진심이야... 너네가 싫은 게 아니라... 상황 파악이 느리고 적응이 느린 것임ㅠ.. 같은 한국인들이랑도 편해지고 말 놓고 한 지 얼마 안됐단다... 사람들이 연애를 많이 해보라는 게 사람 보는 눈을 기르고 자기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알아가라는 차원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난 내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아서 몰랐던 나의 면들. 안녕 새로운 제이. 반갑다. 이십몇 년 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만나는구나. 반가워.


금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학교 근처에 체육센터를 방문했다. 눈이 돌아갔다. 천국이다. 복도에 나열된 머신들... 듣도 보도 못한 머신들이 한 바구니였다... 신나버린 운동짱은 2시간을 운동해버렸다고 한다... 진짜 몸을 움직이니까 좀 살겠다.. 건강한 정신도 깃들고. 정말 최고의 날. 집에 가서는 과카몰리를 만들어 먹고 동생의 자소서를 첨삭해줬다. 2시간 넘게 구글독스와 인스타 페이스 타임을 켜두고 고친 결과 교수님이 고칠 게 없다며 한방에 통과됐다고 한다. 나 한국어로 하면 이정도라고!!!!! 그냥 영어를 못하는 거라고!!!! 인터네셔널 친구들과 대화하면 동질감을 느끼는 게 이 지점이다. 중국어로, 스페인어로,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모국어 잘한다 싶다. 영어로 말하면 언어 표현의 제약이 생겨 뭐랄까.. 다소 귀여워진다고 해야되나.. 쉬운 말로 서로 의사소통하는데 그 짠함... 그래 나도 알아. 나도 그래... 근데 뭐 어쩌겠나. 이겨내야지. 버텨야지. 나아지겠지.

동생과의 통화를 끝내니 어느덧 저녁 19:30. 6컵 쿠쿠 압력밥솥으로 찰진 잡곡밥에다가 수육, 김치, 생마늘, 김자반을 먹었다. 극락이다. 찰진 잡곡밥이 이렇게 맛있었던 것인가... 금요일. 미국 와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다. 참 신기하다. 월요일엔 최악의 날이었는데 4일 뒤 가장 최고의 날이 되다니. 사람 사는 게 그렇다. 언제 힘든 날이, 언제 기쁜 날이 올지 모른다. 하루하루 살아보는거다.

토요일엔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빛 때문에 8시 전에 일어났다.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블라인드 먼지 닦기, 화장실 대청소, 방 청소를 했다. 아마존에서 청소 장비가 왔기 때문이다. 지난 3주 동안 흐린 눈으로 살았는데 이번엔 눈에 불을 켜본다. 한국에서 자취 경험이 없어서 화장실 청소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길러주신 엄마아빠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담아 보낸다. 나 많이 곱게 자란 거였네...


청소 후에 페루 친구들 집에 갔다. 들기름 막국수를 해주는데 채반이 없어서 냄비 뚜껑 잡고 물을 버리다가 면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ㅎ... 남은 양을 나눠 먹었다. 맛은 감동적이었다... 양이 적어서 아쉬웠을뿐. 페루 친구는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한국 문화도 알려달라고 했다. 여기 와서 문화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다. 이전엔 문화라는 단어 자체도 입에 잘 올릴 일이 없었고 당연히 생각할 일도 없었다. 문화는 숨쉬는 공기와도 같아서 다른 문화에 가면 그제서야 차이를 느끼는듯하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문을 잡아주는 문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꼭 인사를 하는 문화, 길가에서 눈을 마주치면 눈인사나 간단한 스몰톡을 하는 문화,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 문화. 페루 친구는 한국에서 하면 안되는 5가지 영상을 틀었다. 살면서 생각은 못했는데 맞아. 실내에서는 신발 벗어야돼, 지하철에서는 조용히 해야돼, 물건을 받을 땐 두 손으로 받아야돼. 생각보다 뭐가 많았다. 문화란 게 그런건가. 2년 동안 문화라는 키워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을 것 같다.

친구 집에서 나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한식의 여운을 이어가고자 김볶밥을 만들었다. 계란 후라이에 들기름 막국수 만들 때 남은 김을 곁들여 먹어야지 싶었다. 아뿔사. 집에 계란이 없다. 당연하다. 여긴 한국 집이 아니다... 사지 않으면 없다. 이렇게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또 가져본다. 여하튼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한국 영상을 보다보니 괜시리 그리워졌다.


일요일엔 듀크 채플의 주일 예배를 드렸다. 분명히 개신교 예배인데 굉장히 카톨릭스러운 장치가 많다. 다음주에도 채플에서 예배드려 볼까 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건물에서 연주를 듣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여기에서 예배를 드린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 예배 후 투어도 들었는데 역시나 많이 알아듣진, 아니 거의 못알아들었다... 이상하게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말씀하시면 잘 안들린다...

예배 가기 전에 화상 영어를 했는데 되게 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 앞에 좀 생략하고 임팩트 있던 말을 적어보면 "All I can be is me. All you can be is you. And you are already good enough. You're doing a MBA in another contry. You are already good enough. You need to see that."


맥락을 좀 더 나누자면, 두 가지 질문을 먼저 했다.

1. 너가 있던 빌딩에 불이 났고 그 안엔 너의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 친구 등 너가 아는 모든 사람이 들어 있어. 딱 2명만 구할 수 있어. 누구를 구할 거야?

2. 너가 나에게 팔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팔 거야?


정답은 둘 다 너 자신이다. 너 자신을 먼저 구해야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팔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All you can be is you. 네가 될 수 있는 건 결국 '너 자신'뿐이고, 다른 사람도 그저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봐주는 것만큼 내가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 MBA에 와보니 내가 머물렀던 곳이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은 많은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고, 나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불안해했던 거더라. 그런 나를 30분 만에 간파한 튜터는 너는 이미 멀리 타국에서 MBA 공부를 하고 있어. 그 자체로 충분히 대단하고, 자격이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다. 너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너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한테 너무 필요한 말을 또 들어버려서 끝나고 눈물을 훔쳤다.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것. 믿는 것. 학원 선생님께도, 엄마한테도 들었다.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듣는데 진짜 좀 이제 인정하자!!!! I AM GOOD ENOUGH!!!!!!!!!!! 학교에서도 나를 인정해서 장학금을 주고 뽑았고, 회사에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아왔다. 주변에서도 인정했다. 나는 아빠에게서 충분한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해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와서 아빠와 떨어져 있어도, MBA 합격하면서 아빠에게 큰 인정을 받았음에도 땅굴파기는 계속되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었다. 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내 스스로가 만들어 둔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은 인정하지 않는 것. 항상 그런 높은 기대치와 낮은 성취도 사이에서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엄마와 통화하는데 엄마는 그건 겸손도 아니라고, 그냥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이라고 하셨다. 자기를 존중하는 것. 물리적으로는 내 자신을 잘 대해주고 좋은 것 맥이고, 몸도 움직거려주고,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하는 게 어렵지 않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게 너무 어렵다. 너무나도 상투적이지만 진실로 눈이 너무 높아서, 완벽주의라. 나 뭐 돼? 아니잔하!!! 내 자신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미국에서의 가장 큰 과제다. 실제로 미국 애들은 자유로웠다. (아닌 애들도 많지만서도..) 드넓은 땅에 보내신 이유를 찾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자유하는 게 아닐까 싶다.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 난 왜 스스로 자유하지 못하는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스스로를 속박해왔을까. 큰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그랬는데 미국에서도 이러고 있다니. 환경적 외부 요인이 아니다. 문제는 내부 요인이다. 해결해봐야지...




다음주에는 전체 MBA 클래스가 모여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Be yourself.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자. 내 색을 더 짙게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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