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걸 르포 -망강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으니까

by 망강과 일영

회사나 친구들 사이에서 명절을 주제로 스몰 토크가 시작되면 대화 판을 초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연휴 내내 해외 여행을 가는 집부터 별 일 없이 푹 쉬는 집, 온 가족이 모여 명절 음식을 만드는 집까지 가슴 땃땃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찬물을 확 끼얹어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보통 내 차례가 돌아오면 "전 저희 집에서 해요"라는 말과 함께 쑥스럽게 "종갓집이거든요"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럼 여자들에게선 대부분 안쓰러운 눈빛이 돌아오고, 남자들에게선 오-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감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사실 종갓집이라고 해봤자 이름만 거창할 뿐. 드라마처럼 스펙타클하진 않다. 그저 평범하게 여자들이 모여 5가지 나물과 5가지 전을 만들고 탕국과 토란국 2가지 국을 끓인 뒤, 보늬를 한땀 한땀 벗겨낸 알밤 한 사발을 넣은 갈비찜(10kg)과 민어, 조기, 병어 등 생선 5마리를 한 번 쪄낸 뒤 2차로 구워내고, 각종 과일과 곶감, 알밤, 대추, 삶은 달걀 등을 예쁘게 다듬어 올리면 그제서야 집안 남자들이 밍기적 기어나와, 음식한테 절한 뒤 둘러 앉아 식사하는 것이 끝이거든. 참 평범하죠? 이 과정에서 본인의 집을 떠올리는 곳도 있을 테고 아닌 곳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여성 동지들의 공감은 대환영이나, 위로 차원에서 '별 거 아니네'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린다면 즉시 총살할테니 조심해주길 바란다.


제사는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특히 산적같은 건 재료가 세 가지나 들어가기 때문에 정말 번거로운 편이다. 심지어 우리집은 전라도식이라 A4 반만한 사이즈로 산적을 부친다. 그 말은 무엇이냐, 고기는 덩어리로 사다 전 날 일일히 얇게 저며 양념에 재워놔야 하고 당근은 하나하나 길쭉하게 잘라 부드럽도록 끓는 물에 데쳐놔야 하며, 쪽파는 뿌리를 다듬어 길이에 맞게 잘라 키를 맞춰 놔야한다는 것이다. 모두 산적을 꿰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부추가 얼마나 다듬기 귀찮은 채소인지는 손질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갈비찜도 대충 양념 넣고 끓이는 게 아니다. 토막난 갈비를 사다가 살코기에 붙은 기름을 하나하나 도려내야한다 (아무리 손 씻어도 누린내 작렬함). 대추는 칼로 양 끝을 도려내고 곶감은 손으로 찰흙처럼 매만져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약과나 한과, 식혜같은 공산품도 그냥 때려 부어 제기에 올리는 게 아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삼각형'에 대한 광기처럼(삼각관계가 재일 짜릿하고 완벽한 서사라는 뜻의 인터넷 밈이다), 제사는 홀수에 집착하기 때문에 식혜에 띄우는 잣까지도 3알을 맞춰야 한다. 이런 복잡한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명절마다 우리 집은 준비에 3일을 쓴다. 명절 연휴가 괜히 3일인 게 아닙니다 여러분.


나는 사실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집들이 우리 집과 비슷하게 명절을 쇠는 줄 알았다. 근데 세상은 그렇게 따숩지 않았다. 아무리 얘기해봐도 <1부 : 대청소와 장보기 및 재료 다듬기>,<2부 : 음식하기>,<3부 : 당일 제사하고 뒷처리하기>로 명절 3부작을 찍는 집은 우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니 뭐니해도 가장 배신감이 들었던 부분은,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한다는 대목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대한민국 아빠, 오빠, 동생들이 전을 부칠 줄 알았던 거야? 혹시 우리 집만 빼고 전부 다 발빠르게 탈 유교하고 있었던 거냐고. 아이고 조상 덕 본 자식들은 명절 때 전부 해외 가있고, 덕 못 본 자식들만 죽어라 음식한테 절한다더니 딱 우리집이잖아? 결국 가볍게 시작되었던 스몰 토크는 대부분 나의 자조적 개그와 함께 의미없는 불행배틀의 1등을 거머쥐며 끝나게 된다. 심지어 연휴 기간 당직이 걸린 직장 동료에게, 니가 더 안됐다며 위로 받은 적도 있었다 (이건 정말 좀 비참했다).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으로 범벅된 내 연휴는 매년 친척들이 바글바글 모일수록 더 외로워지곤 했다.




우리 집보다 작은 규모든 더 큰 규모든, 일단 제사를 지내는 집안의 유교걸이라면 연휴 때 쉰다는 기쁨보단 연휴 내내 밀려드는 집안 일에 자괴감이 더 클 것이다. 가족이 모이면 즐겁지 않냐고? 유교걸들이 제사를 반가워하는 순간은 99.9%로 상에 올라가는 포도가 샤인머스캣으로 업그레이드 됐을 때 뿐이다.


이 쯤 해서 우리집의 가부장제 온도를 체크해보자면 대략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남녀 겸상 금지로 밥상을 따로 분리하진 않으나 밥상을 차리는 건 오직 여자들 뿐이고, 장손인 동생이 부엌문을 수시로 드나들 때도 꼬추 떨어진다며 혼구멍을 내진 않으나 동생이 부엌일을 하는 경우는 그 애가 피곤하지 않은 날에 한해, 선심 써 엄마를 돕겠다고 나설 때 뿐이니까.


이런 집안의 온도 때문에 언젠가 눈이 뒤집어 진 적이 있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5-6년 전이었다. 그 해 가을, 음주 운전 차량이 뒤에서 120km/h로 들이받는 바람에 부모님은 차가 폐차될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설상가상으로 차까지 전복되면서 두 분 모두 크게 다치셨는데, 특히 엄마는 안구를 고정해주는 눈 밑 뼈가 내려앉아 눈알이 돌아갔고 손가락 뼈마디가 부러졌다. 아직도 목과 손가락에 깁스를 한 채 새파랗게 멍 든 얼굴로 입원해 있던 엄마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문제는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웃음기 빼고 드라이하게 말하자면 할머니는 안부 겸 제사 문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파 누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너도 다쳤으니 올해는 그냥 사서 하자'



맙소사, 도대체 할머니께 제사란 뭘까? 제사를 거르면 조상님이 극대노하여 대재앙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신 걸까, 아니면 원래 갖고있던 극심한 편집증과 강박증이 제사에 대한 집착으로 표출된 걸까?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은 그야말로 내게 쇼크였다. 결국 엄마는 의사한테 사정을 설명한 뒤 깁스를 푸르고 잠시 집에 갔다. 그리고는 부러진 손가락으로 전을 부쳤다. 이렇게 병원을 나가면 나이롱 환자로 보고 보험금 지급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화가난다기 보단 다소 미묘했다.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명절 당일에 터졌다. 당시 나는 새벽부터 차례를 지내기 위해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엄마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툴툴 거리며 일을 하던 내게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손주가 기특하셨던 건지 엄마에게 미안하셨던 건지 아무튼 할머니는 나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한 말투로 나를 다독이셨다. 엄마도 돕고 다컸구나 하고.


제발, 제발. 거기서 끝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멈추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내 등을 톡톡 두들기고는 돌아가시며 묵직한 한 방을 날리셨으니까. 할머니는 내게 '힘들면 저 것들한테 시켜라' 고 말하셨다. 여기서 저것들이 혹시 식기세척기나 AI 가정부, 아니면 시리는 아니었을까 아직도 내 기억을 의심한다. 물론론 저것들의 정체는 엄마와 작은 엄마였고.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 백번의 제사와 차례를 지내며 육체를 갈아 넣었던 엄마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엄마는 최근까지 1년에 명절 두 번을 제외하고 제사만 7번을 치르셨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명절과 제사는 별개다!) 며느리였기 때문에 'it'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정도 심하면 병이라더니, 그 순간 할머니가 건넸던 모든 다정한 말들이 (마음 혹은 정신 쪽) 병처럼 느껴질만큼 충격적이고 소름끼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6년치 할 말을 잃었고 최근까지 할머니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니까 요즘은 나와 할머니의 관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내가 자진해서 할머니를 먼저 뵈러가지 않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의 종갓집 장녀 썰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제사 문화를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진행한다면 혼자서도 18시간은 가뿐할 만큼 할 얘기는 차고 넘치니까.


느꼈겠지만 내가 가진 제사와 유교문화,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는 아주 역사가 깊다. 방금 조사를 위해 엄마와 대화하다 우리가 레알 찐 종갓집이 아닌, 집안의 차남 혹은 삼남이 파생한 집안이었다는 사실이 나의 분노를 + 270정도 증가시켰다. 진짜 종갓집이 아닌 종갓집st었다니 몹시 황망하군. 아무튼 나는 미혼임에도 명절 증후군과 공포감을 어느정도 갖고 있는데 심지어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남자의 조건 1순위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안의 차남으로 꼽기도 했다(하지만 방금 전 우리집안의 정체를 알게된 것을 기점으로 차남에 대한 기대는 삭제입니다 삭제). 놀랍도록 착실하게 매 명절 혹은 매 제사때 마다 분노를 느끼고 있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핏줄보다 여성이라는 젠더 의식에 더 두고 있기 때문일 듯 하다. 나는 이 집안의 구성원이기 전에, 여자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가 겪는 부당한 일들을 마치 내 일처럼 느낀다. 그래서 엄마의 부조리에 당사자보다도 더 크게 분노하고. 문제는 그 분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왜 엄마는' 이 모든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왜 엄마는' 이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왜 엄마는' 참는가. 왜, 왜, 왜!


언젠가는 엄마가 차곡차곡 쌓아 온 분노를 화끈하게 폭발시킬 줄 알았다. 한 때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큰엄마의 봉고차 사건' 처럼 엄마도 용감하고 유쾌하게 한 방 날릴 줄 알았다고. 아니 사실 그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소소하게 제사 규모를 줄인다거나, 집안에 크게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제사를 생략한다거나, 온 가족이 함께 명절을 준비하도록 하던가의 결단은 내릴 줄 알았는데. 대신 엄마는 제사 욕을 하는 나에게 '그럼 넌 엄마 제사 안지내줄 거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가끔 불쑥불쑥 이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제사의 종착역은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닐까싶다. 할머니도 극한 시집살이의 피해자셨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증조할머니 애정이 며느리에 대한 질투로 발현되어....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아무튼 시어머니의 질투와 분노를 시집살이의 형태로 온전히 받아내신 할머니는, 당신은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시집살이는 시키지 않겠노라 다짐하셨다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께선 시집살이 전혀 없는 쿨하고 편한 시어머니였다 (엄마 피셜). 근데 위의 에피소드가 시집살이의 일종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 정도는 엄마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면, 나는 얼마나 더 결혼 제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또 실망해야 하는 걸까.


어째뜬 현재 할머니는 제사에 강하게 자아를 의탁하고 계신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부터 제사와 나는 한 몸으로 간주한다, 제사를 욕하는 자는 나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는 밈이 떠오를 정도로. 혹시 할머니에게 제사는 의례를 넘어 홀리한 자아실현의 영역 그 어드메가 아닐까. 가끔 제기를 닦으시던 뒷모습에서 교구를 정리하는 목사의 경건함까지 느꼈던 나는, 할머니에게 제사가 지닌 의미를 가늠할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제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든 아니든 간에, 결국 제사는 유교문화와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들만의 치열한 전쟁이라는 점이 나를 가장 미치게 만든다. 하지만 한국의 뿌리깊은 유교문화를 부술 힘도, 당장 우리 집 가풍을 바꿀 힘도 내겐 없다는 사실에 몹시 무기력해진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독립을 준비하며 집안 행사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야하는 걸까. 재밌는 건 내가 물리적으로 집안과 멀어진다 해서 결코 제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라는 점이다. 모두가 그렇듯 엄마와 딸의 관계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이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 나가다 보면 같이 엉켜있던 애愛와 증憎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나와서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엄마를 상처 입히곤 한다.


예를들면 엄마가 손가락이 부러진채로 전을 부쳤던 날은 내가 온 가족 앞에서 비혼 가능성을 표명한 날이기도 한데, 나는 그 날 모두의 앞에서 '왜냐면 전 엄마처럼 살기 싫거든요' 라고 말했다. 그 말이 엄마를 얼마나 상처줄 지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엄마를 얼마나 작게 만들지 알기 때문에.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가 안타까웠고 미웠으며 그래서 더 공격하고 싶었다. 왜냐면 할머니와 아빠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가장 약한 엄마에게 분노를 쏟아내 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완벽한 비혼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남들 앞에서 (특히 집안 어른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비혼을 다짐할 때가 있는데, 그 땐 40%의 진심, 30%의 반항, 그리고 나머지 30%에 부모님을 상처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원기옥처럼 쏜다.


내가 이렇게 결혼제도의 폐해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도 정신을 못차린다. 아직도 결혼의 가능성을 열어두다니! 답답하겠지만 심한 말은 삼가해줬으면 한다.이런 내가 나도 싫으니까.


나도 언젠간 트위터에서 엄마와 만든 음식을 자랑하며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싶다. 명절의 '명'만 들어도 버튼이 눌리고 분노하며 싸움을 거는 내가 나도 피곤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잔뜩 꼬인 마음으로 엄마에게 못된말을 싸지르고 다시금 후회하는 내가 진절머리 난다.


나도 명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구요. 가부장제의 잔재라던가 혹은 유교문화의 폐해 같은 걸로 받아들이지 않고!




올 추석에는 연휴 시작 전에 엄마와 여행을 다녀왔다. 밤에는 서로 나란히 누워 통 창을 통해 별을 봤고 엄마는 나에게 임신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심했던 내가 슬금슬금 뱃속에서 발을 삐죽 내밀때면 그게 그렇게 놀랍고 귀여워 배를 살살 문질러 나를 달랬다는 이야기. 그러면 나는 엄마의 손길에 작은 발을 움직여 다시 쏙 들어갔다는 이야기. 간혹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배가 단단하게 뭉쳤는데, 그게 마치 뱃속에 있던 나도 함께 스트레스를 받아 몸을 웅크리는 것만 같았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엄마는 내게 넌 엄마 몸에서 반을 뚝 떼어 만든 엄마의 일부라고 했다. 그래서 네가 아프면 엄마도 아픈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아프지 않도록 엄마는 항상 기도하고 또 기도할 거야- 라고. 내 행복이 마치 엄마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원래부터 눈물샘이 헤펐던 나는 티를 내지 않고 우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한 번의 쌍 무지개와 한 번의 별똥별을 만났다. 엄마는 이런 행운은 다시는 없을거라며 소원을 빌었고 그 때마다 두 번 없을 행운은 나를 위해 빌어 주었다. 쌍무지개 중 하나는 흐려서 거의 보이지 않았고 유성은 아무리 봐도 떨어지는 위성 같았다. 별이 이상할만큼 붉은데다 일정간격으로 반짝이며 모스부호같은 신호를 보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위성을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엄마를 위해 두 번은 없을 그 행운을 빌어주고 싶어졌으니까. 내가 너무 작고 연약해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고, 또 모두와 연대할 수 없다면 나는 좀 이기적이라도 오직 엄마만을 위해 기도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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