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릴 때 부터 "계획이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왠진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뤄 두는 것 역시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런 아이의 기질이 오히려 아이에겐 긍정적인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니, 부모가 보기에 긍정적인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7살이 되자,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슬슬 간단한 숙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 돌아오면 손만 간단히 씻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숙제를 마쳤다.
아이의 요청으로 8살이 되던 해엔 수학/국어 학습지를 시켜 주었다.
처음에 아이는 하교 후에 여전히 손만 겨우 씻고 나서 학습지를 풀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날의 학습지를 풀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서도 학습지 숙제는 하루도 미루지 않았다.
엄마인 내가 보기에는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아이는 상당히 불안했던 것 같다.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데, 그걸 끝마치지 않는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나보다.
매일 하루에 수십 번씩 자신의 체온을 재는 아이.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코로나 환자들은 후각이 마비되어 냄새를 잘 못맡는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잊을만 하면 식초 냄새를 맡게 해달라며 나를 졸랐다.
치료 초반, 소아정신과에서, 그리고 언어치료센터에서
초반에 선생님들은 아이에게 "무엇이 불안한지, 왜 불안한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 보셨다.
아이는 코로나가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선생님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이 무서운 것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무서운 것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는 것이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문자 그대로 코로나가 무섭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막연한 불안감 역시 불안장애의 전형적인 양상이라 했다.
아이는 나 또는 남편과 함께 매주 상담센터를 다녔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불안장애는 있지만 아이 자신의 자존감은 매우 높은 편이라는 점이였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아이를 잘 키운 편이라 했다.
심란한 와중에 큰 위로를 받았다.
불안장애 약을 매일 먹고, 상담치료를 병행하면서 아이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 일을 미루는 것"에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
치료를 시작한 지 3개월여만에 보인 놀라운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