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즐기는 현대미술
지난번 압구정동과 청담동 갤러리 투어에 이은, 삼청동이라 퉁치지만 정확히는 원서동과 소격동 갤러리 투어. (5월 마지막 주였던) 이번 외출에서는 유난히 6월 초반 오픈하는 전시가 많은 탓에 오픈 전이라 못 본 곳도 있지만, 소소하게 방문의 시간을 남기려고 한다.
작품을 보며 멍 때리는 경우도 발생하지만,
미술 좀 안다 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내 멋대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고, 업계 사람이 아니다 보니 전문적이지 않은 말들을 내놓을 수 있어 가볍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나 소설의 작의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선생님의 선생님, 언제부터 시작되었을지 알 수 없는 정답을 외우던 시절과 달리 눈앞에 놓인 것을 맘대로 상상하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기도 한다. 공부를 그렇게 했다면, 세상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조금 더 재미있었으려나?
[아라리오 갤러리 ARARIO GALLERY]
문신 x 권오상 깎아 들어가고 붙여나가는
Carving in, Modeling out by MOON SHIN X GWON OSANG, 2024.5.1.-6.22.
"문신(1922-1995)은 특정 형태나 이미지 표현보다 최소한의 조형 단위를 배치하고 구축하는 조형 방식에 천착했다. 그 결과물인 추상 조각들은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유기체적 형태를 갖거나 문신만의 내재적 리듬을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곡선미가 두드러지는 독특한 형태로 귀결되었다. 특히 대칭과 비대칭이 미묘하게 공존하며 만드는 긴장감이나 정면성을 강조하는 형태, 그리고 완벽한 표면 처리는 문신 조각을 감상하는 묘미 중 하나다. ... 드로잉은 대부분 조형의 가장 기본 형태인 원과 선이 연결되면서 확장되는 과정에서의 유기적 묘미들이 감각을 자극한다."
"권오상(1974-)은 90년대 후반 가벼운 조각을 표방하며 등장해 아이소핑크를 조각해 형태를 만든 뒤 사진을 부착하고 코팅을 더해 최종적 표면을 만들어내는 시리즈, 일명 사진 조각으로도 불리는 '데오도란트 타입' 시리즈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권오상의 사진 조각은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명쾌한 시각적 대안의 제시였다는 점에서 첫 등장과 함께 관심을 받았고, 이후 지속해서 다양한 조형적, 기법적 연구를 선보여왔다. ... 작가가 공기의 흐름이라고도 표현하는 조각의 구멍이 두드러지는 이 시리즈에서는 조각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면서 독특하고 다양한 공간감을 이끌어내고, 조각 안에서 또 하나의 작은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조각에서의 구멍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담겨있다."
저공비행 by 차현욱
CHA Hyeonnwook: Low Glide, 2024.5.1.-6.22.
선과 면은 판화와 같고, 색은 수묵채색화 같은 아름다운 산수화에 반해 나조차 맑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오래도록 바라보다 보면 예기치 않은 곳에서 생명체를 만나게 된다. 달려가는 아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 바위를 오르려는 듯한 고양이나 물 마시는 개.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자연에서 평안함을 느끼다가, 작가가 살짝 끼워 넣은 재치를 발견하고는 깨발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저공비행'은 한지 위에 마른 붓질로 색을 겹치고, 압을 주어 선과 같은 자국을 남김으로써 수분이 깊게 스미지 않도록 하는 독특한 제작기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차현욱(1987-)은 한국적 산수화의 준법에서 비롯된 '선'을 주요 요소로 활용함과 동시에, 한국화 안료인 분채를 아교 및 천연 전분과 혼합하여 만든 수성물감인 '안채'와 조개껍질 등 천연 석회를 재료로 하는 '호분'을 사용하면서도 기법의 변용에 있어 서양 회화의 자세를 취한다. 차연욱은 한국적 산수화와 서구적 풍경화 사이 경계를 허뭄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얻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기억들을 수집하고 예술적 형태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두 편의 전시를 봤는데, 이번만큼 관람한 작품을 이해하는데 찰떡같이 도움을 준 가이드가 있었나?
예술품을 먼저 관람하고 가이드를 읽거나, 가이드를 읽고 예술품을 관람하거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다. 뭣도 모르는 회화든 조각이든 먼저 보고 느낄 수 있으면 느끼고, 못 느끼면 말고 한 이후에 가이드를 읽는 편이다. 그래서 관람 중 동행의 다른 이해나 지식이 있으면 한결 재미를 느낀다.
이번 역시 늘 하던 대로 작품을 보고 가이드를 읽었다. 세상에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게 관람객이 느꼈을 작품의 매력 포인트를 짚어주거나 더해주어 관람 경험을 한 발 확장시켜 주고, 관람자(라고 하기엔 나만의 생각이지만)가 궁금해할 요소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으로 건네주다니.
아라리오 갤러리 만세.
[국제갤러리 KUKJE GALLERY]
RENASCENCE by 칸디다 회퍼 Candida Höfer, 2024.5.23.-7.28.
"회퍼는 지난 50여 년의 시간 동안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도서관, 박물관, 공연장 등 문화적 장소를 정밀한 구도와 디테일로 담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인간의 부재를 부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공적 공간이 상정하는 인간의 풍요로운 사회적 활동과 그 역사를 강조해 온 작가는 이번 신작들을 통해 전인류적 역경을 회생과 쇄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공연장과 도서관 사진. 한국의 공간과 다른 유럽의 공간,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공간. 코로나19로 사람들의 방문이 끊긴, 멈춰 있지만 다시 사람을 만나게 될 공간과 맞춰 보진 않았지만 좌우대칭을 정성스럽게 맞춰 성능 좋은 카메라로 찍어 출력한 인화물.
그런데, 사진 이상의 작가만의 무엇을 기대했던 것 같다.
구조적으로 피사체가 아름답고, 구도 면에서 사진이 완벽하다 해도 살아있는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피사체 사진은 그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느낌이 아니며, 찰나의 특별함을 담았다고 하기에도 아쉬움이 있다. 그렇게 느낀다.
[페레스프로젝트 PERES PROJECTS]
정점의 직전 by 엑스 미스유타
AKS MISYUTA BEST BEFORE, 2024.5.16.-6.30.
러시아 작가 엑스 미스유타(1984~)의 첫 아시아 개인전.
사람이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형태를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일부분만을 취해 마치 추상화처럼 표현하고 있다. 명암법(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이라는 기법으로 작품을 그리는데(그린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나), 컬러를 최소화하거나 많은 컬러를 넣는다 하더라도 검은색을 극대화해 사용하기 때문에 형태와 컬러 두 가지 면에서 어둡고, 강렬한 작품들이었다.
어두움, 지난번 탕 컨템퍼러리에서 관람한 요나스 버거트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어두움. 강렬한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감탄스러울 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흡입력이 있었다. 작은 공간에 있으면 왠지 기에 눌릴 것 같고, 넓~은 공간에 하나 있으면 간지 날 것 같은 그런 작품.
그런데, 작가의 작품을 보고 오래전 연극 <광부화가들>에서 나온 영국 애싱턴, 북부 광산촌에 살며 그림을 그린 광부들의 일부 작품에서 느꼈던 생명력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면... 그것은 왜일까.
"미스유타는 자신의 경험과 타인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사전 계획 없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어두운 색의 물감으로 첫 번째 레이어를 칠한 후, 오토마티즘에 가까운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사람의 형상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직관과 즉흥을 포용하는 그녀는 무언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풀어내며 친밀하면서도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카타르시스적인 연출의 손놀림은 존재의 복잡성을 함축하는 연상적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오는 길. 갤러리 큰손인가, 현장에서 작품의 가격을 묻는 이를 보았다. 처음 목격하는 장면이 드라마에서나 봤던 미술품 경매 장면을 본 것처럼 짜릿했다.ㅋㅋ
[갤러리현대 GALLERY HYUNDAI]
김창열 : 영롱함을 넘어서
KIM TSCHANG-YEUL : Beyond Iridescence, 2024.4.24.-6.9.
말해 무엇하나. 물방울로 이미 유명하다는 말조차 무색한 김창열 화백(1929-2021)의 개인전.
작가의 조형 의식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는 이번 전시는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영롱하고 동그랗게 맺힌 물방울뿐만 아니라, 한자를 배경으로 하거나 컬러와 무늬가 있는 배경 위의 물방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물방울이 합쳐지거나, 흘러가다 맺히거나, 얼룩을 남기거나, 마르다가 조금 남아 있거나 하는 다양한 형태로 관람하는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몇십 년을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며 거장이란 불리는 예술가. 그와 가족들의 삶은 어땠을까. 물방울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하나 쓰거나 그렸을까 궁금증 또는 놀라움을 준 배경지의 한자는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셨다고.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 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입니다." -김창열(1976)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간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서사를 품은 은유적인 언어로 읽히고 해석되어 왔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던, 김 화백이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반세기 이상 묵묵히 고심하며 실험한 물방울의 다양한 표현과 그것이 놓인 표면과의 관계, 즉 조형 언어의 여정을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