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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May 27. 2024

[숏트립] 압구정동, 청담동 갤러리 투어

멋대로 즐기는 현대미술

오랜만에 압구정동, 청담동엘 갔다.

자주는 아니라도 이따금 커피나 식사를 위해 방문하던 동네였는데 북쪽으로 이사를 한 이후에는 거의 나들이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명품이라는 브랜드가 나란히 넓고 높게 자리한 청담동의 건물들은 변함이 없고, 여전히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브랜드들도 여전하지만 군데군데 그리고 압구정동의 매장들은 꽤나 많이 변화했다. 지금 핫하거나 힙하다는 매장들로 대체된 것이겠지만. 이곳에 있어 명품인 건지, 명품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이사이 숨어 있어 알지 못하는 갤러리들도 많지만, 친구의 추천과 나의 흥미로 계획한 오늘의 루트는 차례대로 걸으며 즐기기에 적절했다. 조금 친근하고, 꽤 낯선 길. 



아틀리에 에르메스 ATELIER HERMÈS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 by 클레어 퐁텐 Claire Fontaine

2024.3.22.-6.9.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오직 4도(It's only 4 degrees)"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빠작빠작 금이 간 유리와 열기가 가득함을 짐작할 수 있는 컬러의 이미지가 강렬했는데, 기후위기에 대한 작품이라고 한다. 

전시 공간의 전체 바닥 또한 하나의 작품이었는데, 도시 주변의 오래되고 금이 간 타일 사진을 콜라주한 설치작업 "컷업 Cut Up"이다. 바닥 위 곳곳에 놓여 있는 레몬은 처음 공간에 들어서서, 그리고 어느새 잊혔다가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며 걷다가 불현듯 인식할 수밖에 없어 살짝살짝 피해 걷게 되는데, 이 레몬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유럽 남부의 상징이자 발에 차이며 공간 어디에도 존재하는 이민자들의 컬러풀한 침범을 비유한다고 한다. 동선을 방해하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색감만으로도 전시 공간에 신선한 에너지를 부여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고. 이 레몬들이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라 정말 쨍한 컬러의 실물이면 어떨까...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람자가 조금은 더 생생하게, 좀 더 존재감 있게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 아쉬움은 나의 솔직함. 

제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전시된 작품들은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는 무언가들을 작가의 의미부여와 재가공에 의해 재창조된 것들이다. 이런 현대미술을 접하면 뒤샹의 "샘 Fountain"이 떠오른다(클레어 퐁텐이라는 이름은 역시 "샘"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단다). 과거의 미술사적 논란과 현재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일상의 주변적인 것들에 대한 개개인의 의미부여와 그로 인한 가치생산은 지금의 나에게 흥미로운 사안이다. 


"클레어 퐁텐은 콜렉티브이자 여성주의 작가로서 작품 소유권의 개념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미술 시스템에 도전해 왔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영국 출신의 미술가 제임스 손힐이 함께 설립한 클레어 퐁텐은 프랑스 문구 브랜드의 상표명에서 가져왔다. ... 이미 존재하는 시각적 양식을 가져다 쓰는 행위는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예술가 상을 버리고 스스로를 일상 오브제와 같은 예술가로 자리매김하려는 결심을 의미한다. ...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을 재가공하거나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이란 명분으로 차용한 작품들은 실제로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마법적인 영감에 의해 완성된 유일무이한 개성의 산물로 여겨진다." -안소연/아티스틱 디렉터(전시 가이드 中)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生-빛과 결 by 김덕용 Kim, Duck-Yong

2024.5.2.-5.31. 


아뜰리에 에르메스 현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갤러리 나우는 예전에 사진 스튜디오로 몇 번 방문한 기억이 있는 공간이다. 직원분에게 우연히 듣게 된, 갤러리를 오픈하고 코로나19를 맞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그리 드물지만은 않은 사연이다. 스튜디오의 일부가 갤러리로 바뀐 것에 호기심이 일어 방문했다가 기대 이상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았다. 

나전(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 넣거나 붙여서 만들어내는 공예 기법) 작품인데, 단순히 아름다운 자개의 오묘한 컬러뿐만 아니라 그 작디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어두운 하늘과 별, 소박한 도시의 밤, 창 밖 너머 해지는 바다의 모습과 빛이 아름다웠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위해 들였을 시간과 땀과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술의 감동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찰나의 감성과 번뜩이는 감각도 존중하지만 지난한 시간 동안 열과 성을 다한, 그 아름다운 결과물에 더 감동받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 사람의 지고지순한 애씀과 노동을 사랑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기준으로는 예술가와 장인이 맞닿게 되는 것 같다.  

 

점은 씨앗이고

씨앗은 생명이다


생명은

형체가 변할지라도

결코 소멸되지 않고

함께한 그들의 마음에

한 점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 김덕용



송은 갤러리 SONGEUN GALERRY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by 나탈리 뒤버그 Nathalie Djurberg & 한스 베르그 Hans Berg 

2024.5.17.-7.13.


미술을 담당하는 나탈리 뒤버그와 음악을 담당하는 한스 베르그는 완벽한 협업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는 스웨덴 출신의 듀오 작가, 그래서 두 명이 아닌 그들의 개인전.  

그들은 동화, 우화, 신화 등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이번 전시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과 같이  애니메이션 영상(클레이와 목탄 그림을 스톱 모션 기법으로 구현), 사운드와 조각, 설치 미술까지 담아내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보다는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 캐릭터의 이미지와 그로 인한 감각, 감정들에 집중하길 바란다고 한다. 

어렸을 적 한 번은 읽고 상상했을 법한 커다란 입을 가진 늑대와 달걀 같기도 감자 같기도 한 형태의 울퉁불퉁한 달, 돼지는 웃기고 귀엽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늘 같은 깃털을 가지고 있는 새와 하나의 나무에서는 자라지 않을 서로 다른 아기자기하면서도 야생과 환상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꽃은 보석처럼, 독버섯처럼 화려한 총 천연 컬러를 모두 가져다 놓은 듯하다. 그래서 하나하나를 보자면 신기하고 예쁜데, 전체를 한눈에 보고 있자니 내가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시간마다 약 40분 간 진행되는 도슨트 투어가 있는데, 10-20분 미리 가서 작품을 한 번 돌아보고 도슨트 투어에 참여하면 좋다. 



탕 컨템퍼러리 아트 TANG CONTEMPORARY ART 

sinnwild by 요나스 버거트 Jonas Burgert 

2024.4.19.-5.25.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빤히, 깊이 쳐다보는 눈과 마주친다. 노려보는 것은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애정 어린 눈빛도 아니다. 새까만 눈동자가 커다란 그 눈에는 감정이 없지만, 동시에 감정과 이야기가 가득하다.

sinnwild라는 제목(개인전 제목이자 작품 제목)의 요나스 버거트 개인전이다. sinnwild는 독일어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두 개 단어를 합성해 만든 혼성어로 번역하자면 '야생적 감각'을 의미한다고. 

내가 본 것은 야생의, 동물적인 그 무엇이구나. 새까만 눈과 입술산이 오똑 솟은 입을 담고 있는 얼굴의 표정, 몸에 걸친 의상과 소품, 그들의 자태, 함께 등장하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인 존재들, 그 모든 것의 컬러들... 어느 하나 강렬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절대 없다.

친근하지 않은,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혼란스럽지만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 그 안의 존재들만으로도 강렬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에조차 이를 수 없는 작품들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어디에 꽂혀 있을까 궁금하다.


돌아와서 안내문을 보니 "버거트의 드로잉, 회화, 조각들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라고 인지할 만한 것들을 말하거나 자체의 허구적 세계를 구축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 ...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어떠한 특정의 문화나 전통에 대한 지식이나 이런저런 미술사에 대한 조예를 요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전시가 이미 끝나서, 너무 아쉬운 마음에 작품 사진을 남겨본다



현대 인간 사회, 자연의 서정성, 환상과 잔혹 동화, 기괴하고 아름다운 암흑을 하루에 경험했다. 내 멋대로 가치 있게 꽉 찬 시간이었다. 

단체 또는 개인 소장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미술 작품, 예술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어느 선생님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공간에를 찾아가는 수고로움만 들이면 큰돈 들이지 않아도 다양하고 감동스러운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이. 

좋았다. 



덧. 갤러리 투어 전 가끔 생각나던 떡볶이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몇 년 만에 갔더니 매장이 넓고 깔끔해져 매장 내 식사가 쾌적해졌고, 역시나 가격도 꽤나 올랐다. 조금 더 선호하는 밀떡이 아닌 쌀떡이고 좀 짜지만 여기만의 새우깡떡볶이와 제주장아찌김밥 역시 오늘의 괜찮은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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