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 정신이 거기에 있었다(2)

비로소 나를 돌보다

by 여느

나의 정신건강을 처음으로 염려하고, 아프지 않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마음은 병든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그간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병세가 심하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가버리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신기하게도 심연에서 몇 가지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20살의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당시 특별히 우울하거나 스트레스 수치가 높지는 않았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고 침대 밖을 벗어나는 것이 버거웠다. 동면 시기를 맞이한 동물처럼 틈만 나면 자려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수업이나 다른 일정이 없다면 하루종일 잘 수도 있었다. 예전엔 지각이나 결석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여기던 모범생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느라 수업을 못 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무척 많았으나 어느새 버킷리스트는 다 잊고서 하염없이 쉬기만 했다. 수험생 시절 내내 간절히 바라던 대학생이 막상 되고 나니 의욕 없이 무료하게 보내버리고 말았다.


꽃다운 시기가 허무하게 흘러가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게을렀노라고 여겨왔던 그 시기는 이제야 판단컨대 분명한 번아웃이었다. 학창 시절 입시라는 하나의 또렷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죽은 이는 원 없이 자니 부럽다 생각할 정도로 잠을 줄여가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했고, 긴장의 끈을 놓으면서 정신도 맥을 못 춘 듯하다. 지칠 대로 지쳐 끊임없이 자고 쉴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이 병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정신건강이 안녕하지 못한 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찾아왔다. 한 기업에서 인턴생활을 할 무렵이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회사서는 애써 밝게 지냈지만 집에 와서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넓은 집도 아니고, 조그마한 자취방 한 칸인데도 청소하고 정리할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의 나로선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집을 엉망으로 하고 지냈다. 최근에 우연히 읽은 글에 따르면 집안이 무척 지저분하지만 치울 여력이 없다면 우울증일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감히 짐작컨대 당시 번아웃 내지는 초기 우울증 증상이 함께 있었던 듯하다. 번아웃이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나간 탓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정신건강을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마음을 건강하게 다지지 못한 채 맞이한 변화는 또 한 번 정신건강을 흔들어놓았다. 취업 준비 기간을 거쳐 정규직 직원으로 처음 입사했을 때, 다소 우울감이 있었던 듯하다. 신입사원으로서 감정적으로 억눌려있고 긴장이 된 상태였다. 더불어 그간 준비해 온 노력들이 입사라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허무함과 허탈한 감정도 따라온 것이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쁜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닥친 조직 문화 적응과 야근 앞에서 사회생활의 씁쓸함을 알게 되었다. 예전처럼 집을 엉망으로 해놓는 것까진 아니어도 기력이 없는 건 비슷했다. 어떨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기도 했다. 철학자가 된 듯이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수십 년 후에도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단순히 적응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심하지는 않지만 우울증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산후우울증으로 괴로웠던 때를 포함하여 내 인생 전반에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기들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사회적 지위 등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다는 점이다. 십여 년의 학창 시절을 지나 성인이자 대학생이 되었을 때나 처음으로 회사생활을 맛보았을 때, 제대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로 거듭났을 때까지. 큰 변화 앞에서 휘청거리곤 했던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서야 나의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적응을 잘하는 편이고 무딘 성격이라 정신건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나였기에 놀라운 발견이다.


변화 앞에서 적응을 하는 시간 동안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생각보다 내 정신은 많이 흔들려왔다. 이제라도 깨닫게 된 만큼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둘 것이다. 정신적으로 힘들 거라고 받아들이되 증세가 어떻게 나타날지 면밀히 살피고 심각하다 여겨질 땐 얼마든지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것이다. 그저 끙끙대다 지나가길 바라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치료가 필요하다면 받아서 덧나지 않게 보살필 것이다. 출산 덕분에 나의 소중한 신체는 물론 마음의 건강도 챙기게 되는 계기가 되어 아이에게 다시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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