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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도서

by 토리가 토닥토닥

독립하면서 행복했던 것이 있었다. 원 없이 책을 마음껏 사고 소장할 수 있겠구나. 작은 책장을 비우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안심이었다. 튼튼한 원목 책장까지 새로 생긴 터었다. 기름 가득 채워진 차를 몰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곳곳의 알라딘을 순회하고 신림동과 낙성대역의 헌책방을 다니며 마치 예쁜 옷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책은 순식간에 포화상태가 되었고 책장을 하나 더 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8년 어지러운 책장

책장의 60%는 문학, 20%는 사회과학, 10%는 전공, 나머지 10%의 자연과학책이 온통 섞여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과감한 정리에 들어갔다. 책을 정리하는 것은 생소하고 어려웠다. 책을 쓴 작가들과 멀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아까웠다. 정리의 과정에서 '애착'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고 싶다.




1.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플랭클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빅터 플랭클 교수가 겪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이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자아성찰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을 정리했다.


동굴의 시기 이 책이 내 마음을 읽어주고 있었다. 고마운 책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2. '화차' 미야베 미유키

일본 소설에 한창 빠진 적이 있었다. 책장의 1/4이 일본도서였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 일본어학원 새벽반에 등록했었다. 일본 펜팔을 시작했고, 일본 드라마를 통해 일본어를 복습하고는 했다. 그 시간은 무려 3~4년이나 지속되었지만 남는 건 이제 화차와 몇권의 일본소설 뿐이다.


일본 소설의 특징은 문장이 짧고 단순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장점은 얇은 책이 많아 일주일 출퇴근 시간이면 한 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화차는 461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다. 어떤 책이든 가독성 좋은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독서 지구력이 짧은 나에게도 읽기 시작하자마자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다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한참 남아 주변에도 읽기를 권유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앞둔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자 자취를 감춰버린다. 끝까지 그녀와 가족을 몰아붙이는 사람들. 그들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무림 치는 여자가 택한 선택. 과거를 감추지 않으면 어떤 미래도, 희망도 꿈꿀 수 없는 여자의 고통이 차분한 문장 속에서 표현된다. 이 소설의 강점은 구성에 있다. 탄탄하고 담백하며 치밀하다.

무엇을 물을까는 문제 되지 않는다. 나는 자네를 만나면 자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자네 혼자서 힘겹게 등에 짊어지고 왔던 이야기를. 도망 다녔던 세월 속에서, 숨어 지냈던 세월 속에서, 자네가 비밀리에 쌓아왔던 이야기들을.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다.


3. '키다리 아저씨' 지인 웹스터

웬 소녀감성이냐 할 것이다. 이 책을 만난 것은 1988년이었다. '제루샤 애버트'라는 고아 소녀가 스스로 이름을 '주디 애버트'로 바꾸는 그 경쾌함에 반했던 것 같다. 스스로 이름을 바꿀 줄 아는 나이 어린 소녀가 좋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들이 흥미로웠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문장 속에서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생각이 참 좋았다.


이 책은 그저 고아 소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인 지인 웹스터는 1876년에 태어났다.

웹스터는 이 작품을 통해 불우한 어린이들을 사회가 함께 보호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빈민굴, 고아원들을 방문하며 사회사업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런 그녀의 생각들은 이 책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모순과 종교의 모순을 신란하게 비판하며 아직 여성에게 부여되지 않은 참정권을 문제 삼는 등 진보적인 사상도 보여주고 있다.

역경과 슬픔 그리고 실망이 도덕적 정신력을 발전시켜 준다는 이론에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남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염세주의자를 믿지 않습니다.

뜬금없지만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와호장룡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손을 꼭 쥐면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손바닥을 펴면 온 세상이 그 안에 있다." 욕심만으로 책을 너무 안고 살았다. 책은 지금도 정리 중이다.


비워진 책장... 2020년 지금도 계속 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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