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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몫’을 담당하다.

by 토리가 토닥토닥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004년 ’저소득 무의탁 재가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여정을 통한 편안한 삶 마무리 프로그램‘이다. 말그대로 저소득 재가 독거어르신들을 위한 죽음준비교육, 호스피스 및 방문간호 연계, 수의마련, 장례식 진행, 화장, 서류(행정)처리, 연고자 찾기 등이 있었다.


30대 미만의 젊은 사회복지사에게 죽음에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정말 ’죽을만큼‘ 힘이 들었다. 나에게 죽음은 고등학교 1학년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밖에는 없을 시절이었다. 그 결과 밤에는 술을 퍼마시고 낮에는 복지관 문밖으로 나가 한숨을 쉬며 더 무너지기 전에, 더 망가지기 전에 퇴사를 해야겠다고 결심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처음 장례를 지원해드린 분은 동주민센터에서 의뢰하셨던 분이다.

종묘공원에서 오랜기간 노숙생활을 하시다가 노숙인 지원을 하시는 신부님께서 당시 옆에서 간호하시던 남편분과 인연을 맺게 해주신 후 얼마안되 병을 얻어 임종을 앞둔 분이셨다. 아침 출근길 임종하셨다는 남편분의 전화에 바로 버스에서 내려 집 앞으로 가는데 마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10분이 100분 같았다.

그 분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소주 한잔만 마시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남편분의 눈물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수의를 지원받으신 어르신 부부도 기억이 난다. 백발이 성성하셨던 선한인상의 두 어르신에게는 큰 상처가 있었다. 큰아들은 사업실패로 가족들과는 연락두절이고, 의지하던 작은 아들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상태였다. 결국 의지할 것은 두 분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의가 아니라 장수복이니 건강하게 오래 사실거라며 더 오래 길게 이야기를 나눴던 안타까운 나의 마음이 아직 거기 있다.




일이 진행될 수록 내가 왜 이 업무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마음가짐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으나 임종을 앞둔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가는 만큼 사회복지사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 분들의 상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상심은 늘 있었다.


늘 딸이 하는 일에는 별 말씀 없으시던 엄마께서 제발 “사회복지를 그만두라.”는 이야기에도 그러나 다시 복지관으로 출근하고 유족의 손을 잡고 있거나 장례식장을 들었던 원동력은 지금 생각해보면 죽음은 부와 명예와는 상관없이 공평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참 좋은 몫'

그러나 장례라는 단어와 붙어 살았던 그 기간을 통해 지금까지도 현재의 내 삶과 내가 만나고 있는 분들 또 만나야 할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깝고 귀중한 삶인지에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주려 하는 사회복지사로서 혹은 한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에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현장을 지키기위해 노력하던 그 시절의 나로부터 현재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 삶과 죽음이 귀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도 역시 귀중하다는 것.

사회복지사로서 ‘참 좋은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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