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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를 고백하다.

by 토리가 토닥토닥

봄이 왔다.


해마다 돌아오는 봄은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2월에 입원하신 아버지는 5월에 영면하셨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고, 의지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워 한 발자욱 다가서기 어려운 분이셨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 하면 생각나는 것은 4가지인데 경찰 제복과 권위주의자이며 구두쇠,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연천 그리고 영안실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셨다. 경찰업무 중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경찰서 혹은 파출소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97년 시위하다 잡혀 들어간 동작경찰서에서 나를 조사하던 경찰관 분이 아버지에 대해 아시는 척을 하셨다. 그저 그 기억만으로 아버지 마지막 근무처가 동작경찰라는 정도와 집에 유달리 박정희, 이승만 전기가 많아 아버지가 좋아하는 정치색을 대학가서 알게 되었다는 정도다.


절약이 대단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되고도 남을 일이다. 당시 친할머니는 대를 이을 자손이라 생각하신 ‘아들’에 대한 집착이 크셨다. 그 집착은 엄마의 결혼생활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괴롭혔다. 어찌 됐건 그 결과는 딸 4명이었다. 외벌이셨고, 가진 것이 없는 빈농에서 출발한 처우와 소득이 낮은 하위 공무원이셨다. 자신을 포함하여 6명의 가장인 아버지가 구두쇠 성향을 피할 수 없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팬티까지도 언니들에게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은 어린 나이에도 힘이 들었다.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은 고등학교 합격 후 잘했다고 받은 5,000원이었다. 지금 나도 필요하지 않으면 돈을 쓰지 않는다. 평상시 최대한 사치는 마트 순례이고 딸 4명 모두 욕심이 없다.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연천과 관련된 기억 중 가장 큰 것은 비번날이면 낮 근무 건 밤 근무 건 쉬지 않고 친할머니의 농사와 가축을 돌보러 가셨던 것으로 시작된다. 낡은 용달을 몰고. 그 작은 용달 3인석에 동생이 태어나기 전 어린 딸 3명과 엄마까지 태우고 부지런히 다니셨다. 나중에 동생이 태어나고, 딸 3명의 몸이 커진 이후에도 연천행 용달은 중지되지 않았다. 탑승인원은 4명에서 3명으로, 3명에서 2명으로 줄었지만 92년 입원 몇 달 전까지 연천행 용달을 꾸준히 몰고 계셨다.


그나마 연천에 대한 기억은 따뜻하다. 신분증이 없이는 출입하지 못했던 전방이었기에 늘 군인들 만 있던 동네였다.

제일 좋은 기억은 여름새벽 서늘한 나무냄새. 임진강과 한탄강에서의 물장난, 눈 내리던 날 겨울 아궁이, 낫으로 자를 때 올라오던 신선한 풀냄새, 가득 실린 잡초 위 누워 보던 하늘.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아버지가 영면하시고 친할머니가 나에게 "너가 아버지 대신 죽어야 했다." 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워낙 시간이 오래되어 그 기억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잊어버리려 애쓴 끝에 흐려진 것 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집안 가장 사망 후 벌어진 여러 상황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마지막 기억은 세상을 떠나신 그 해 추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꾼 꿈이다. 꿈 속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마르셨던 아버지가 늘 입으시던 점퍼를 입고 살이 팽팽하게 오르신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나도 모르게 "아빠 왜 우리들을 버리고 갔어?"라는 질문에 말없이 안아주시고 깨어났다. 그 꿈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다.


아버지 산소로 올라가는 길


책은 늘 책상 모서리에 맞춰있어야 했고, 비번날 집안청소가 되어 있지 않거나 TV를 보고 있으면 불같은 화를 내셨다. 어쩔때는 우리 자매들을 향해 '밥벌레들' 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시기도 했다. 큰일이 아닌 상황에서 교복입은 큰언니가 가장 많이 맞아야 했고, 나머지 3명은 무릎을 꿇고 손을 하늘 위로 올리고 있다가 순서가 되면 앞으로 나가 손바닥과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 아버지는 나에게 짐과 같은 기억이 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고백할 수 없는 기억들.




사회복지 업무를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속에 숨은 나를 발견한 적이 많았다. 본인의 삶을 위해 집을 나간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경제소득 활동이 힘들어지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였다. 자녀들이 필요 부양자서 본인소득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위해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너무 늦게 연락하셨다고 끝까지 거부한 사례들이었다. 부모는 그저 낳아준 사람일뿐이라는 답변이었다. 철저한 외면으로 인한 정서적, 경제적 결핍과 뻥뚫린 상심은 누구도 이해해지 못할 것이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했다. 나에게도 상황은 다르나 동질적 '결핍'은 피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지나고 생각이 조금 더 자란 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일에는 산소에 가고 설과 추석명절에는 작은 밥상을 차리고 아버지를 생각한다. 사실 어떤 드라마틱한 계기는 전혀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아버지에 대해 보고싶다거나 그립다는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간혹 다른 자매들과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각기 가진 기억이 많이 다르다. 나만큼이나 상처가 많은 자매도 있고, 덤히 받아들이는 자매도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억이다.


올해 봄에도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금번 기일에는 큰언니 가족과 동생이 함께 간다. 북적북적한 봄의 시작이 될 것이다. 계신 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아버지, 만약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그땐 환하게 웃으면서 만나요. 저도 바르고 착하게 살다가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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