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따랐던 둘째 언니가 7년 전 호주 멜버른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꼭 한 번 엄마를 모시고 호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커져만 갔다. 연세가 있으신 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장시간 비행기 타기가 어렵다는 것이 결심을 더욱 빠르게 키워 주웠다.
멜버른까지 한국 항공기는 직항이 없다. 외국 항공사로 경유해야 한다. 비행기 값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해도 체감적으로 만 하루를 좁은 비행기 속에 있어야 한다. 걱정은 되었지만 언니가 떠난 후 늘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셨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8년 3년간의 계약직을 마무리하고 엄마와 가족을 위한 여행 구상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결정은 퇴직금을 올인하여 엄마, 나, 큰언니, 동생, 막내 조카의 왕복 비행기표와 여행경비로 일종의 ‘가족 투자’를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여행은 즐거웠고 두 번은 하지 못할 과감한 투자에 스스로 놀라웠다. 오랜만에 만난 호주 조카들은 나의 키를 넘어가 있었고 어른을 닮아가는 말투가 신선했다. 엄마와 언니의 상봉을 보며 ‘스스로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버른에서의 시간은 하루 종일 뒷마당에 앉아 공기만 마셔도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멜버른 언니네 집 뒷마당무엇을 하던 계기는 필요한 것 같다. 그 시작은 여행 마지막 아침에 시작되었다. 출국 당일 식탁의자에 앉던 그 순간 허리가 욱신하며 통증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으로 도착한 다음날 재채기 한 번으로 입원이 진행되었다.
입원기간 동안 살이 정말 쑥 빠졌다. 난생처음 ‘핼쑥하다’는 단어를 처음 경험했다. 진통제를 세끼 식사 대신 먹은 결과였다. 그 한 번의 ‘핼쑥’은 나의 살도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통원 치료기간 동안 '다이어트'와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라는 투지에 불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운동은 쉽지 않았고 결국 잘할 수 있는 건 식사량을 평상시의 1/10로 줄이는 것뿐이었다. 제일 먼저 손등의 혈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등의 살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종아리의 뼈가 만져졌다. 그렇게 온몸의 뼈들이 하나하나 만져졌다.
대식가가 소식가로의 전환은 힘들었다. 입원해 있던 2주, 8kg를 시작으로 24kg이 빠졌다. 그동안 하루에 한 끼, 밥은 밥숟가락으로 2숟가락, 18시 이후 안 먹기. 살은 역시 운동보다는 안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뒤돌아 생각해보면 체중이 살아가는데 큰 방해된 것은 거의 없다. 누가 봐도 비만은 확실히 맞았지만 취업하는 것도, 옷 사 입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마라톤 10km 2번, 한강 나이트 워크 15km 완주) 불만 없던 몸이었다.
다만 살이 빠지면 어떤 일이던 무리 없이 될 것 같은 환상은 있었다. 그러나 살을 빼도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던 두배의 노력을 해야 하나가 완결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살과는 상관없이 내 몸에 만족하며 산다. 추가된 것이 있다면 행복이 머 별거 있나 라는 마음으로 사소함 속에서 만족 찾기 중이다.
매일 만나는 발달장애인 및 보호자분들의 이름을 외우고 인사하기, 동생과 함께 산책하기,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들에 늘 감사하며 솔직한 고마운 마음 표현하기 등이다.
24kg 감량보다 더 중요한 건 여전히 자존감을 잘 지켜내고 주변과 잘 어우러지기 위한 노력이다.
만약 6kg 더 감량하면 살 빼기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