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포함하여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사회복지사는 내가 아니라 동생이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루키는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한다. 동생과 함께 집에 들어가면 루키가 반기는 순서는 정해져 있다. 동생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응, 너 왔니. 놀다 가라.” 단 3초다. 그러나 동생을 바라보는 루키의 눈빛은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라는 사인이 묻어 있다.
그런 동생이 가져온 동물들은 정말 다양하다. 햄스터부터 산책하다 버려진 강아지까지 엄마는 아직도 동생이 가져온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정도다. 얼마 전에는 엄마 집 앞 골목길에 개 한 마리를 집주인에게 찾아주고 나서 출근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 개가 그 집에 살고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 나도 동물을 좋아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기르던 아끼고 사랑하던 강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 동물을 기르는다는 것이 힘들다.
그러나 동물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일상에서 언제든 벌어진다. 그리고 짧은 생의 마무리를 지켜볼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10년 전 어느 날은 동생이 가져온 햄스터가 제 수명을 다 할 때까지 살았다. 시간이 지나 수염과 눈썹털이 하얗게 변했어도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 몰랐다. 그래도 사는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죽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동생과 함께 햄스터를 깨끗한 천에 감아 놓았다가 인적이 없는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뒷산으로 가 묻어주었다. 원래는 쓰레기봉투에 버렸어야 하지만 도저히 그러거나 그래서도 안될 것 같았다.
2년 전 일이다. 나는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는데 집 근처에는 터줏대감 길고양이 2마리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고양이들이 햇빛을 즐기거나 낮잠을 자러 자주 오는 아지트가 있는데 창문 맞은편 집이다. 그곳에서 비 오는 새벽 내내 고양이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음에 잠이 몇 번이나 깼다.
새벽 내 잠을 뒤척이다 동이 틀무렵에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소리는 고양이 아지트 방향의 약 15cm 간격을 둔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였다. 그 간헐적인 울음소리는 큰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새벽에 고양이가 출산을 하다 새끼 고양이가 슬레이트 지붕에 미끄러져 담벼락 사이로 빠진 듯했다. 어미로 보이는 고양이가 안타까운 듯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도저히 팔을 뻗거나 내려가기에도 그 높이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집에 들른 동생에게 고양이 소리가 밤새 났다고 이야기했다. 정장을 입고 있던 동생은 약속까지 미뤄두고 119에 전화를 하고 직접 담벼락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담벼락과 마주하고 있는 집에까지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어찌할 수 있겠냐는 말과 몸짓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저 울음소리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냐며. 살아있는 생명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매섭게 이야기했다.
119는 이제는 동물 구조는 하지 않는다며 거절을 하셨다. 그런데 동생은 집 근방에 있는 119 구조대로 직접 찾아가 한 번만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정말 동생의 수회에 걸친 간곡한 부탁에 소방관들이 오셨다. 그리고 두 마리의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을 꺼내 주셨다. 정말 119 소방관들께 무리한 부탁으로 죄송스러웠고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어미 고양이가 나타날 것 같았고, 동물 프로그램을 보니 사람의 손을 탄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 고양이가 더 이상 돌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근처 박스 속에 새끼 고양이들을 일단 놔두었다. 결국 어미 고양이는 오지 않았다. 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외출을 마치고 동생이 돌아왔고 둘이 앉아 여러 동물병원에 문의하고 관련된 인터넷 자료들을 검색하며 어떻게 케어해야 할지 찾아보았다. 동물병원에서는 소용없다고 데리고 오지 말라 하셨고 검색에서도 좋은 내용들은 없었다.
해지기 전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나의 의견을 무시한 동생은 고양이 2마리를 결국 집으로 데려왔다. 출산 후의 비릿한 피 냄새와 비 냄새가 섞여있었다. 체온을 높이기 위해 수건으로 감싸고 페트병에 온수를 담아 옆에 두고 계속 문질러줬다. 동생은 근처 동물병원에서 고양이들을 위한 분유와 젖병을 사 왔다. 인터넷에 몇 시간마다 분유를 먹여야 하는지 검색했다. 먹이고 나서는 어설프게나마 소변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시는 회사를 잠시 쉬고 있던 때라 다행스럽게도 어린 고양이를 돌 볼 시간이 충분하겠다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나는 잠이 들었고, 아침에 동생은 나를 깨웠다. 고양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다. 순간 무엇을 더 했어야 살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미안했고 집으로 데리고 오자 했을 때 좀 더 기다리자 했던 내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동생은 내가 잠든 사이에 운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수건에 잘 감싸 놓은 고양이를 다시 쓰레기봉투에 버릴 수는 없었다. 태어난 지 하루가 되지 않은 생명들이었다. 길고양이의 삶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생을 다 살아보지 못했다. 그런 고양이 새끼들에게 폐기물과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했다. 잘 마무리해주고 싶었다. 인적이 끊긴 밤에 동생과 뒷산에 올랐다. 비가 내리는 시기여서 검은 밤은 그 빛이 더해져 있었다. 휴대폰 손전등 하나만을 의지한 체 고양이를 조심히 묻어주고 다음 생은 편안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나의 눈물이 터진 것은 다음날 동물보호단체에 아기 고양이들을 위해 샀던 분유와 젖병을 보내기 위한 통화에서였다. 사연을 전하고 주소를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만큼 책임감 없이 버리거나 학대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나는 그 사람들이 범죄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동생과 같이 생명을 존중하고 처해진 환경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동생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져 동물에게도 생명권이라는 중요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회적인 중요한 가치로서 알아주기를 바란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죽은 기르던 동물이 마중을 나온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동생 앞에는 햄스터부터 길고양이들까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동물들을 줄 서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