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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아 Oct 11. 2020

책을 읽다 감전(感電)을 겪었다.

오디오북이 활성화된 지금 책을 읽기보다는 들을 때가 많다. 그러나 듣는 책은 생각보다 기억에 오래가지 않고, 여운도 짧다. 내 속도에 맞춰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악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분량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적 아빠는 한동안 다양한 종류의 동화전집을 집에 가져오셨다. 삽화가 예뻤던 그 동화전집들은 세 자매 중 늘 내 차지였다.


가장 좋아했던 책은 아직도 주인공 이름인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기억나는 파랑새, 눈의 여왕이었고, 반면 싫어했던 책은 행복한 왕자였다. 행복한 왕자를 읽으면 화가 났다.

나는 주인공은 왕자가 아니라 제비라 생각한다. 왕자는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하며 기뻐하는 조각상이다. 그리고 제비는 갈대 아가씨와 사랑 때문에 지각해버린 남쪽 여행자 일뿐이다.


그런 제비가 왕자의 선행 메신저로서 하필 왕자의 매력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다가 추운 겨울 왕자보다 먼저 죽어버리는 바보 같은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조각상이 언제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제비의 마음을 어떻게 낚아챘는지 제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어린이는 왕자를 한동안 미워했었다. (물론 리얼트루 진정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겠다 싶다. 그러나 어릴 적에는 문자 그대로만 읽다 보니 저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오스카 와일드가 썼다는 것을 알고 무언가 내가 모르는 철학이 담겨 있겠지 한다.


독서에 대한 호감이 확 높아졌을 때를 생각해본다.


책을 읽다가 가슴에 쩌릿쩌릿 찌르르 감전되었던 경험이 있었다. 이범선 작가의 오발탄이다. 오발탄의 뜻은 잘못된 탄환이다. 6.25 때 월남한 가족 장남인 철호, 출산 중 죽는 부인, 상인 군인 남동생 영호, 양공주 여동생 명숙 등은 모두가 다 전쟁 피해자이다.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철호를 비롯한 가족 모두는 오발탄이다.


“양심을 버리고 윤리와 관습을 무시하고, 법률까지도 범하고!”라고 동생에게 말하는 철호는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부딪혀온 그 시대는 모두가 다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필연적이다. 삶은 계속해서 뒤틀리고, 뒤틀린 삶을 바로잡기에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미약하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따르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철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흥건히 그의 와이셔츠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 신호동의 파란불 밑으로 차는 네거리를 지나갔다.

결국 가장 위태로웠던 사람은 파랑새와 양담배 중 양담배를 택하고 은행을 털다 잡힌 남동생도, 몽유병을 앓다가 출산 중에 죽은 부인도 아닌 주인공인 철호였다.


잘 버티고 있던 철호를 하나하나 무너트린 것을 무엇일까 한동안 생각했었다. 내가 철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놓아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만큼 오발탄이 나의 독서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후 문학 소설을 읽게 될 때면 어느 순간 내가 주인공이라면 이렇게 생각해볼 텐데 혹은 이렇게 행동해볼 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책장의 90% 이상이 문학책으로만 쌓여있던 적도 있었다.


30년 전의 오발탄이 나에게 온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평생 몇 번 없을 쩌릿한 독서 감전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오발탄 같은 글이 몇 번 더 와주었으면 한다. 물론 그만큼 많이 읽어야 올 수 있다. 이에 게을러져 버린 나 스스로에게 책을 읽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옛 버릇을 다시 불러 일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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