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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아 Oct 14. 2020

다양한 삶의 모습

10년 전 진행한 업무 중에는 복지관 내 노숙인 시설 폐쇄 있었다.


복지 프로그램은 변화되는 지역주민의 욕구에 기반해 만들고 없어진다. 없어지는 것은 또 다른 프로그램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행정업무 속에는 아동이 없는 지역아동센터를 비롯해 필요성이 떨어진 프로그램들을 폐지한 경험이 있었다.


한 번은 이미용 프로그램을 폐지하게 되었다. 정원이 10명 이었는데 3명 이하로 2년 이상이 유지되던 프로그램이었다. 사용 중인 실을 당시 함께 운영하던 지역아동센터를 위해 사용코자 했다. 이용 중인 지역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여 프로그램 비용이 완료되는 해당 월에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프로그램을 위해 개별 구매한 메이크업 박스였다.


남은 1명의 주민이 없는 살림에 메이크업 박스를 구매했으니 무조건 더 수강 해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전에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공지를 6개월 이상 진행했고 동의가 완료되었기 강사도 이미 다른 곳으로 이직한 후였다.


끊임없는 민원이 시작되었다. 매일 해결하라는 관공서의 독촉 전화에 신경이 곤두섰다. 결론은 6개월 동안 이미용 시험을 보기 전까지 프로그램실을 그분의 연습실로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마무리되었다.


이미용 프로그램의 폐지는 노숙인 시설 폐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복지관 안에 있는 노숙인 시설 폐쇄 사유는 (물론 좋은 분들도 많았다.)일부의 음주와 노성 방가, 싸움 등으로 경찰출동이 잦았고 지역주민들의 민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쌓인 기간들결국 폐쇄를 결정하게 되었다.  


시설 폐쇄는 15명의 40~50대 중장년 남성들의 간담회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15명이 쏟아내는 비난과 욕은 견디기 힘들었다.


또한 시설 종사자에게 권고사직을 이야기하는 것도, 다른 노숙인 시설 이전을 위한 공문처리도 쉽지 않았다. 4월에 시작된 협의는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그 기간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 다 먹었다. 한 번은 운전하다 말고 내가 왜 이러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에 주차하고 멍하니 몇시간을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움텅움텅 빠지고 주말에도 업무전화에 시달렸다.

물론 기관장이나 부장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총알받이는 실무자인 나였다. 한 번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공문이 왔다. 인권을 침해했다는 사유로 인터뷰했다. 장문의 사유서를 쓰고 공문을 보냈다. 구청과 시청에서 꾸준하게 정당한 사유가 들어간 공문을 계속 요청했다. 해명이 필요할 때마다 출입했다. 너무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도 배운 점은 있었다. 그것은 다양한 삶의 모습이었다.

한분은 끝까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이전. 그러나 갈 곳을 정할 시간이 필요한 몇 분도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좋은 시기에 만났더라면 참 좋았겠다.” 라며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나누며 인간적인 친분도 쌓았다.


분노를 버리고 대화를 시작하니 사람과 인생이 보였다. 그런 마음이 쌓여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그분들 모두가 지역사회로 편입되어 당당한 지역주민으로 살기를 원했다.


지역사회에 살기 위하는 분들을 위해 LH나 SH에서 지원하는 전세임대주택이나 임대아파트의 정보를 지원하고 행정처리를 도와드렸다. 과정에서 오래전 헤어졌던 아들과 연락을 시작하며 새집으로 초대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 분도 있었다. 나와 나이가 같은  분이 계셨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했다. 그렇기에 또 다른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며 아르바이트도 함께 구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혼자 살기에는 용기가 부족하다 했다. 시설에서 지 기이 너무 길었다 생각했다. 그분을 위해 다시 공문을 작성했다.

한 분이 이야기했다. “다시는 시설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 만큼은 여운이 긴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했다.


몇 달 후에 한 분을 거리에서 만났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분은 나를 피해 다른 골목으로 몸을 돌렸다. 아마 본인이 노숙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보는건 심리적으로 힘든 일이라 생각하며 그 마음을 응원했다.


노숙인 시설 폐쇄 후 습관이 생겼다. 내가 만나는 사람 모두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그 뒤에 그를 응원하는 마음들도 함께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응원하는 사람이 어디서나 귀한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 탓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갑을로 규정짓는 관계들을 보면 세상을 덜 겪었구나 생각한다.


노숙인으로 불렸던 그분들에게도 가족과 나를 포함하여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심은 진심을 알아준다. 그렇기에 내가 노숙인 시설을 폐쇄하며 배운 것은 모든 삶은 존중받아야 하며 삶의 가치는 서로가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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