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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아 Nov 09. 2020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기도하기

이제 막 10살을 넘긴 아이에게는 늘 똥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얼마나 강하고 독한지 아이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아이가 아니라 발달장애인 고모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똥냄새와 담배냄새, 오랫동안 청소와 환기를 하지 않은 쾌쾌한 집 안의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 작디작은 집에 고모와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삼촌, 그리고 아이까지 5명의 식구가 살고 있었다. 삼촌은 집 안에 있어도 얼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고모와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살림을 하셨으나 바퀴벌레가 개수대 구멍을 꽉 채워 물도 잘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혼을 했고, 아빠는 집을 나간 상태였다. 아이는 항문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 배변주머니를 달고 살다가 4살이 넘어서야 항문 만드는 수술을 했다고 들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배변훈련을 진행하는 항문기를 이미 충분히 지나있었고 수술 후에도 훈련을 도와줄 가족이 없었다.  


아이는 정말 많이 먹었다. 앉은자리에서 보통 성인이 먹는 4배, 5배를 먹었다. 아이는 먹고 그대로 바지에 소변을 비롯한 모든 배변을 그 자리에서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이를 제때 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했다.


그 집을 방문한 후 제일 먼저 계획한 내용은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것이었다. 청결한 공간이 5식구의 모든 의식주를 감당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요청사항이기도 했다.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삼촌 덕에 담배의 타르가 찐뜩찐뜩 묻어있는 중간문을 떼어 세척을 하고 요리를 한 흔적이 없는 개수대에 세제를 붙고 솔로 열심히 문질렀다. 화장실의 세면대와 변기에도 소독제와 세제를 붙고 씻어 내렸다.


그러나 장롱을 열었을 때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다. 아이 그대로 싼 배변이 묻어있는 팬티를 장롱에 쌓아둔다고. 장롱은 화장실이었던 셈이다. 아이에게 제대로 된 배변 과정은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사람들이 냄새로 피하든지 말든지 아이는 그저 생리현상을 처리하는 방법과 속옷을 빨아야 하는 의미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상담과정에서 장애인 2명을 케어하는 것도 힘들다며 아이의 아빠와 엄마는 전혀 연락이 닿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셨다. 정말 어렵고 어렵게 꺼낸 말은 ‘시설로의 입양’이었다.


할아버지와 몇 달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얼마큼 아이를 사랑하는지를 알기에 ‘시설로의 입양’은 무책임이 아니라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식사도, 학교도 무엇하나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늘 시달리고 계셨다.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청소는 하루를 다 채웠다. 그 후에 진행한 것은 아이에게 배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마려우면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에 가서 배변을 한다. 그리고 화장지로 뒤처리를 한다. 이 3단계의 간단한 과정을 반복해서 훈련했다. 팬티는 화장지가 아니며, 장롱은 화장실 휴지통이 아니라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어떤 날은 잘 지켜졌고, 어떤 날은 또다시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는 그 와중에 맑게 웃고 있었고 직원식당에서 같이 줄을 서서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다.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늘 남을 위해 기도하셨다. 자신보다 힘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그 도움에 감사함을 보이셨는데 아직도 인상에 깊은 것이 있다.


어느 날 소금포대를 가지고 오셔서 책상 위에 놓고 가신 것이다. 다시 소금을 들고 댁으로 가 소금을 내려놓아도 급기야는 어떻게 아셨는지 집주소를 알아내 집으로 소금을 보내셨다. 일하면서 무엇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 나에게 ‘소금포대’는 아직까지도 인상 깊은 할아버지의 선물이다.


아이와 세 번째 했던 일은 학습이었다. 뒤늦게 입학을 해야 하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적응을 잘하기 위한 방법은 공부밖에는 없었다. 유치원 과정에 있는 교재로 가르쳐도 아이는 쉽게 지쳤다.


아이를 접하면서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으나 모든 여건이 따라주지를 못했다. 케어해야 하는 가족이 너무 많았고, 할아버지는 오로지 혼자셨다.


할아버지를 도와드리려 애를 썼지만 그 노력 어떻게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도 나는 할아버지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그리고 아이가 잘 자랐기를 여전히 기도한다.


요즘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가고 싶은 현장이 어딘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다시 밝게 웃고 살아가려 애썼던 그 현장들이 그립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되새김질한다.


일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이 있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마음으로 위로하고 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디서부터 함께 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경험과 경력이라 이야기해도 좋지만 사회복지사이기에 더 적극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과감성과 직업적 책무감에 늘 감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  할아버지와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현장 사회복지사로서 채워지지 않고 있는 허기짐 때문일 것이다.


종교 없는 사람이지만 서툴게 나를 위해 기도해본다. 내가 가진 경험과 사회복지 기술들이 필요한 곳에 잘 활용되어 사회복지사로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원하는 분들 모두가 나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위로가 되고 숨이 조금이라도 트이는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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