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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아 Nov 17. 2020

스님의 자격

사실 종교가 없는 나는 일을 통해 종교의 모습들을 두루두루 볼 기회가 많았다. 특히 성직자 옷을 입거나 본인보다 종교를 먼저 소개하던 사람들의 행동들은 나에게는 그 종교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쳤다.


아우디 혹은 제니시스를 끌고 다니는 스님들, 가톨릭에서는 나이 많은 수녀도 나이 어린 신부에게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한다며 복종을 안 할 거면 나가라고 했던 가톨릭계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시설 원장님, 지금은 아니지만 개신교를 믿지 않으면, 혹은 교회를 법인 교회로 옮기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겠다 하시던 목사님들이 참으로 많았고 지금 어딘가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과정들을 통해  어느 순간부터 성직자의 옷을 입은 분들의 언행일치를 더 이상은 믿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보다 혜민스님의 집을 보고 입이 쩍 벌어지게 되었다. 미국 국적에 하버드라는 범접하기 힘든 대학을 나온 것은 알았어도 스님들이 보편적으로 가져줬으면, 혹은 그래 주었으면 하는 ‘청빈함(성품이 깨끗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 가난하다)’ 이미지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일반의 사람들보다 더 최신의 정보통신기술을 보유하고 있거나 사업을 운영하는 승려의 가사를 입은 보통 일반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불교를 잘 모른다. 십수 년 전 금강경을 공부하고자 스터디에 참석했으나 어려운 한자들에 질려 몇 회 나가고 '죄송합니다.'라며 슬그머니 안 나간 게 전부다. 지금은 솔직히 가끔 사찰에 들러 부처님께 합장하며 “착한 남자 만나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 주세요.” 등의 기도를 드리는 얕은 수준일 뿐이다. 그만큼 승려의 삶을 잘 모른다. 그러나 티브이 속 그분의 모습은 스님들의 좋지 않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뉴스를 도배할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힘든 이 시기에 혼자만 평온한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머리카락을 불가에서는 무명초(無明草)라고 한다.  스님들이 삭발을 하는 것은 무명초를 자르는 의미인데, 무명초를 자르는 것은 탐내고 화내며 어리석은 마음, 탐·진·치 삼독(三毒), 그 모두를 다 버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성직자의 성(聖)은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하다는 뜻이다.


관련 검색어만 쳐도 '직업'을 통해 벌어들인 그 수많은 '소유'가 성직자라는 타이틀 정말 적나라하게 상업적으로 사용했다는 생각을 먼저 들게 한다. 무종교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종교에 의탁하고 기대는 사람들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거나 혹은 진정어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필요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 힘은 크다. 나 같은 사람도 가끔 기도를 하니까.


몇 해 전에 그분이 했다 하는 말도 회자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 모자라 마음 아파하는 워킹맘에게 "새벽 6시에 일어나 놀아주는 방법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위로도, 응원도 아무것도 아니다. 현실의 삶이 무거운 사람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정말 세상을 등진 의미 없는 문장일 뿐이다.


그렇기에 굳이 '소유'를 자랑하듯 과시한 그분에게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스님'이라는 삶의 선택이 오늘의 결과물을 위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약자들을 위한 나눔의 삶으로 함께 해주셨으면 더 좋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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