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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준 Jan 09. 2024

함박눈보다 함박웃음

태백산 가는길 식당 할머니

태백산 능선길의 함박한 마음

예전부터 마음속에 담았던 태백산에 다녀왔다. 딱히 태백산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는 아니고 그냥 이름에 끌려서 언젠가는 한번 가봐야지 막연히 생각만 하던 곳이다. 

눈소식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이 난 김에 벼락치기하듯 대략적인 정보만 훑어보고 무작정 떠났다. 눈꽃산행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상고대가 없는 화려하지 않은 산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꽃이 피지 않은 무뚝뚝한 가지 끝마다 하늘의 다채로운 색들이 걸려 보이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태백호텔에서 운영하는 태백 눈꽃 야영장에 짐을 풀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대략적인 장비로 몸빵하는 스타일이라 캠핑장의 낭만을 잘 즐겨보지 못했는데, 관리인 아저씨가 누가 버리고 간건지 있었다며 화롯대를 빌려주셨다. 바람이 너무 강해 불이 붙지 않아서 착화제를 사러 왔다고 하자 이걸로 붙이면 되지 하고는 토치를 빌려주신다. 별 생색내는 기색도 없이 그냥 친절을 툭툭 내던지며 짓는 소박한 웃음. 화려하지 않은 태백산 기슭에 어울리는 저녁이었다.


다음날, 대설특보가 내려 서둘러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식당 한군데 정도는 들러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근처 '태백산 가는길'이라는 식당에 들렀다. 혼자 먹을 수 있는 건 갈비탕과 청국장 정도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나를 손주처럼 반겨주셨다. 어쩐지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먹는 동안 짜지는 않냐며 묻고는, 괜찮다 맛있다고 하니 허허 웃음 짓는 할머니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줄이 달린 전화기를 붙잡고 동네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시는가 싶더니, 일요일에는 40명 정도 단체예약이 잡혔다고 뿌듯하게 말씀하시며 웃는 모습이 참 고우셨다. 카드 돼요? 라고 묻는 내게, 카드도 좋고 현금으로 주면 더 좋고 라고 말하며 허허 웃으시는 할머니. 주머니를 뒤적여 현금을 꺼내 손에 쥐어드리자 다시 한번 환하게 웃음 짓는 할머니.


함박눈은 없었지만 기분 좋은 함박웃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시간. 가지에 피어난 화려한 눈꽃이 아닌 소복히 쌓인 눈처럼 푸근하고 묵묵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풍경으로, 태백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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