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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May 21. 2024

두 세계 사이에서

1등급 객실을 타고 불난 섬 체험하기

* 스포일러 포함

'강 건너 불구경'은 얄미운 짓거리다. 그럼 ‘강을 건넌 불체험’은 괜찮을까.

이 영화는 저널리즘이란 미명하에, 예쁜 글감으로 전락해버린 사람에 대해 들려준다.



빈곤층 노동자를 다룬 영화하면 이 분야의 거장 켄 로치나 다르덴이 떠오른다. 심지어 <두 세계 사이에서>도 실제 노동자인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했다니까 정말 비슷하다. 다만 요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 같다. 켄 로치나 다르덴이라면 크리스텔을 중심으로 청소노동자의 삶을 진득허니 그렸겠지만, <두 세계 사이에서>는 작가 마리안의 도덕적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전자의 방식이 그저 카메라를 따라가며 청소노동자의 삶을 직빵으로 목도하는 방식이었다면. <두 세계 사이에서>는 마리안의 눈을 거쳐 청소노동자의 삶을 본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크리스텔을 생각함과 동시에 마리안의 시각과 마리안과 크리스텔의 관계까지 생각하게 된다. 즉, 평소 켄로치나 다르덴의 영화를 보는 나, 혹은 체험기사를 보는 (그니까 간접 체험을 한) 나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거 그냥 다 재밌을라고 봤던 거 아녀?", "이것도 그냥 재밌자고 쓰는 거 아녀?"


영화를 보다 몇가지 생각난 것들을 줄거리의 흐름대로 성의없이 늘어 놓아 보았다.


유명 작가인 마리안은 빈곤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다. 그녀는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력을 위조한 뒤 직업 소개소를 찾는다. 노동 현장에서 겪게 될 처우와 실제 노동자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직업 소개소의 직원 중 하나가 마리안이 작가임을 알아챈다. 마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경제위기, 실업률, 비정규직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고 싶다" 이것이 그녀가 저소득층 부캐를 만든 명분이다. 마리안은 잠입 취재가 기만적이란 의심이 들지만 명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들리긴 하지만, 정말일지 모른다. 그녀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이 되어 나중에 훌륭한 활동가가 나올지, 정치인이 나올지, 사회가 변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잠입 취재를 하는 본인의 마음 안에서 상쇄되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여전히 걸러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글감으로 활용되는 진짜 삶의 주인공, 마리안을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여전히 마리안의 저소득층 부캐가 주인공으로 다녀간 현실에 남는다. 남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삶이 발가 벗겨진다.


마리안은 청소노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크리스텔이라는 인물과 가까워진다. 크리스텔은 애 셋을 키우는 싱글맘으로, 청소노동의 최하층 던전급인 선박 청소를 하고 있다. 이 정보만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 듯, 크리스텔의 삶에서 여유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마리안은 그녀가 '경제위기, 실업률, 비정규직의 삶'을 드러내는 가장 적합한 주인공으로 선점했으리라. 마리안은 다소 의도적으로 크리스텔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크리스텔의 여유 없는 삶의 태도와는 달리. 마리안은 가짜 부캐를 만들었긴 했지만 특유의 부자 바이브를 숨길 수가 없다. 그니까 연탄 나른답시고 얼굴에 숯검댕은 뭍힐 수 있어도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긴 어려운 법이다. 다른 청소노동자들이 복권 당첨의 꿈을 이야기할 때 마리안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회피하며, 크리스텔과 퇴근 후 드라이브를 할 때는 나무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속 좋은 소리를 해대며, 심지어 해변에 가서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더니 수영을 한다. 빨리 집 가서 애보고 쉬어야 하는 크리스텔 입장에서는 얼탱이가 없는 상황. 거리를 유지하던 크리스텔은 "얼마 전까지 가정부를 두고 살았었는데, 이혼 후 이런 처지가 된지 얼마 안 됐다"는 마리안의 거짓말에 마음을 열고 만다. 가짜 마리안을 동료로,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마리안도 담배를 3년간 끊었던 담배를 그녀가 건네자 입에 물고, 마리안의 생일날 전해준 목걸이를 영원히 목에 멜 것을 다짐한다.

어느 날, 선박 청소를 하던 크리스텔, 마리안, 그리고 또 다른 20대의 청소노동자인 마릴루는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다. 셋은 선박 객실에 두고 나온 마릴루의 외투를 가지러 갔다가 출항해버린 배에서 미처 내리지 못한다. 셋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1등급 객실에서 샴페인과 마카롱을 따서 마시는 일탈을 누린다. 이 장면은 크리스텔에게는 매우 위험하고 잔인하기 까지 하다. 지금 타고 있는 1등급 객실처럼 언제든 이 구질구질한 삶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마리안, 영국에서 모험이나 할까라는 속 좋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젊은 마릴루, 그 사이에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크리스텔의 아슬아슬한 일탈 중의 웃음은 툭 치면 영원히 꺼져버릴 것 같은 파리한 전등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면서 이런 실례를 쉽게 범한다. 긴 출퇴근 시간으로 일에 지친 사람에게 자기계발을 하라는 둥, 가족을 부양하기 바쁜 사람에게 네 자신의 자아와 행복을 찾으라는 둥의 이야기는 얼마나 몰이해적인 행동인가


담배를 피러 갑판으로 가던 마리안과 크리스텔은 우연히 마리안의 지인을 만나게 된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마리안의 지인은 마리안에게 "청소노동자에 관한 글을 쓴다며?"라는 얘기를 꺼낸다. 그 날, 마리안에게 진실을 들은 크리스텔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지? 당신은 가짜모습을 믿게 만들었어. 당신은 나보다도 못한 존재야" 마리안이 말한 가짜란 '직업'을 말한다. 사실 직업 외에 마리안이 크리스텔을 대하는 태도, 마음을 속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인간 관계에서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임을' 묻는걸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크리스텔에게 선박 청소노동자라는 직업은 돈벌이 수단만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의 내밀한 삶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층위를 의미한다. 그 층위/테두리 안에서 동료이자 친구관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중요했던 거다.(딴 얘긴데, 이게 바로 한동훈의 동료 시민이 꼴같잖게 들리는 이유다.) 크리스탈은 저널리즘이고 뭐고 관심없다. 그저 관계가 거짓이었다는 점에 분노할 뿐이다.


이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난 섬에 남은 '관계의 문제', '관계의 상처'라는 점은 이후 이어지는 세드릭과의 대화 시퀀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드릭은 마리안을 좋아하는 청소노동자로 약간의 썸관계를 유지하는 남자다. 마리안은 세드릭과의 첫만남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저는 거짓말을 종종하는데...그래도 거짓말이었다고 밝히는 편이에요." 세드릭은 그러면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 종반부에 세드릭과 마리안은 다시 만난다. 세드릭은 썸타는 여자에게 피자트럭 자영업자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자기가 실수했냐고 마리안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마리안은 그건 실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건 굳이 적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만, 역지사지의 질문이다. 마리안은 자신의 직업을 속인 것 자체가 실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드릭이 그 여자와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 마리안은 "잘 됐다"고 축하한다. 그러자 세드릭은 "내 말을 이해 못했군요. 당신과 이제 예전처럼 데이트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제서야 마리안은 자신이 크리스텔에게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네요 슬프네요" 칸트의 도덕관으로 보면, 이는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한 결과다.


시간이 지나, 마리안의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책 제목은 영화와 동명인 <두 세계 사이에서>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축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리안은 창 밖에 우두커니 선 (두 세계 중 창 밖의 다른 세계에 선) 마릴루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릴루와 함께 다시 크리스텔이 있는 부두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크리스텔은 마리안에게 두 번의 질문을 던진다. "담배를 피겠냐", "아직, 나랑 객실 청소를 할 수 있겠냐" 이건 아직 내가 알던 마리안이 그 몸뚱아리 안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저 마리안의 몸뚱아리엔 선물 받은 목걸이만 빛을 바란 채 걸려있을 뿐, 크리스텔이 알던 마리안은 그 속에 없었다. 마리안은 두 질문 모두에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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