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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Jan 19. 2021

10년 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나를 열등하게 하는 고마운 사람들

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책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켜켜이 쌓인다. 망할 놈의 게임은 서버 접속만 한 시간이다. 지금 같으면 온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사이버 렉카가 몰려와 씹을 얘기지만, 그땐 그러려니 했다. 아마 관대함은 시간에서부터 나왔겠지. 방학 중인 나는 친구와 매일 포트리스를 즐겼다.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했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중학생의 에너지를 모두 포트리스에 쏟았다. A4용지에 캐릭터 위치별 포탄의 각도 등을 분석한 종이를 모니터 옆에 붙여뒀다. 포를 쏠 때는 초감각을 동원해 스페이스를 뗐다. 그 나이에 일찍이 수포자를 선언했지만 딜레이 계산은 정확하게 했다. 문학적 능력도 총동원했다. 포탄을 날리지 못했을 때는 더 강력한 욕설 포탄을 타이핑했다. 남은 만화책을 다 읽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사는 행복하는 인생이었다.


글 쓰기 덕분에 의미 있는 역사적 사료를 찾았다.


이게 내가 친구 A를 회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친구 A를 약 10년 만에 만났다. 이따금 소식은 들었었는데 어엿이 사장님이 되었다. 놀랐는데 의외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간다. 포트리스의 기억을 걷어내니 여러 장면이 스친다. 가만 생각하니 우리 둘은 게임만 하고 살진 않았다. 펑크에 빠져 펑크 머리를 해보기도 하고, 힙합에 빠져 p2p 프로그램으로 몇 날 며칠을 음악을 다운 받고 또 불렀다. 남들이 교복을 줄이니 늘려보기도 하고, 엄마 액세서리와 매칭해 동대문을 가보기도 했다. 그밖에도 일반적인 행동을 벗어나 이상한 것들을 해보려던 노력들이 기억났다.

 

왠지 브루스 웨인처럼 보였다


"네 영향을 많이 받았지."

A는 이 말을 하고 A버전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생각들에 대해 쏟아냈다.

살면서 저런 말을 들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고마움은 1초였다. 무섭고 부끄러웠다.

"너라면 그랬을 텐데-"하는 A의 말속, '나'에 대한 괴리감이 들었다. 


A의 말은 나에게 닿지 않았고 '내가 아닌 존재'를 향했다. '내가 아닌 존재'란 단순히 '과거의 나'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A와 대화한 것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발전시킨 나였다.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도전을 '가상의 나'와 묻고 답하며 스스로를 발전시켰다. 


그곳에 나는 없다. 여기가 내가 두려웠던 지점이다. 나는 '가상의 나'와 '과거의 나'까지 거울을 맞대고 마주했다. 부끄러워 오래 차마 오래 쳐다볼 수는 없는 모습이다.



가상의 적과 수련을 하고 있는 제다이 키즈들


최근, 한국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달라졌다. 한국의 문화나 태도가 후진적이지 않느냐는 물음은, 코로나 대처 시민의식과 K-pop으로 많이 누그러들었다. 나는 한국의 의식 발전도 위와 같은 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북유럽은 감각적이야, 유럽은 철학적이야, 일본은 깨끗해, 미국은 이성적이야 등등 타국의 좋은 면만 보고 느낀 열등감은 개선과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실제로 상기한 국가들이 그런 면만 있는 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린 모두 안다. 하지만, 가상의 이미지와 싸운 결과 귀중한 것을 얻었다고 본다.


나는 내 안의 열등감을 발견했는가. 지금 가상의 상대는 누구인가.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거북이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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